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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전성기 경주는 인구 90만의 거대도시

“신라전성기 경주는 인구 90만의 거대도시”


서울대 지리학과 출신인 이기봉(40)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조금은 생뚱맞게도 박사학위 논문주제로 신라와 경주를 택했다. 역사를 접목한 지리학도의 관심주제가 대체로 조선시대 지도에 한정된다는 점과 비교할때 모험에 가깝다는 말을 이미 당시에 듣기도 했다.

현재 규장각 책임연구원인 그가 시도한 신라왕경 경주의 '지리역사학적 해명'이라는 항해에는 그가 예상한 수준보다 훨씬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에 대해 기존 역사학계가 구축해 놓은 '통념'의 벽이 철옹성을 방불케했기 때문이다.

당장 박사학위논문 심사진 중 한 명이었던 서강대 이종욱 교수와도 그가 논문에서 제출한 신라왕경의 범위라든가 그 인구는 현격한 괴리를 빚었다. 전성기 경주 인구를 10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본 대목은 문제가 많다는 이 교수의 지적이 나온

지 불과 1주일 뒤에 이기봉은 왜 경주 인구가 그 정도인지를 나름대로 해명한 별도 논문 1편을 보강해 제출하기도 했다.

이기봉은 말한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신라 전성기에 경중(京中)에는 17만8천936호(戶), 1천360방(坊) 55리(里)와 35개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고 했는데 왜 이 당시 경주인구가 17만여 호였다는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17만여구(口)의 잘못된 기록이라고 억단하느냐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나온 문헌이라 기록의 신뢰도가 낮다는 지적에는 "그렇다면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에 새겨져 있는 당나라 소정방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에 멸망 당시 백제 인구를 620만명으로 기록한 것은 무슨 낮도깨비냐"고 반문한다.

이기봉은 "왕경 경주 인구가 17만여 호가 아니라 17만여 인이라 주장하는 이들은 '조선의 한양도 잘 해야 4-5만명에 불과했는데'라는 인식을 은연 중에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산업혁명 또는 근대화가 시작되기 이전 도시의 규모는 후대로 갈수록 더 커졌다고 보아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같은 시대 일본의 왕경 헤이죠쿄(平安京) 인구가 대략 20만명이었으므로신라 왕경 인구 또한 그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추정 혹은 주장에는 "에도시대 에도는인구가 100만 명을 넘었는데, 같은 시대 한양 또한 인구가 100만명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비판한다.

2002년 초에 심사를 통과한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이 토대가 되긴 했지만, "인용문과 표 그리고 지도를 제외하면 학위논문과 같은 문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완전히새로 쓴 단행본 '고대 도시 경주의 탄생'(푸른역사)에서 이기봉은 인구는 점진적으로 늘었다는 통념을 거부하면서,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보면 한반도 인구는 대체로 "증가→축소→회복 등의 반복이 있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전성기 신라와 경주 인구가 조선시대 전체 혹은 한양 인구보다 반드시 많아야 할 이유가 없듯이 적어야 할 이유 또한 없다는 것이다. 인구 변동을 파동으로 파악한 셈이다.

삼국유사 기록을 받아들일 때 전성기 신라왕도 경주는 약 90만명이 거주한 거대도시가 된다.

그가 그린 경주 그림이 역사학계 주류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인구와 함께 그 범위라고 할 수 있다. 기존학계가 신라왕경을 구성한 주축인 이른바 육부(六部)를 지금의 경주평야로 한정한 데 비해 이기봉은 현재의 경주시 구역 전체는 물론 울산 등을 아우른 지역으로 간주한다. 광역자치체 개념으로 본 것이다.

이기봉은 "근대 이전 유럽에서 통일신라보다 더 많은 인구를 지닌 통일제국은 기껏해야 로마제국, 그리스, 그리고 알렉산더제국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이런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한반도 구석에 자리한 고대국가 신라의 '스케일'을 다시 보자고 외친다. 384쪽. 1만4천원.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