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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미술관전 ''만종과 거장들의 영혼''

박수근 화백이 흠모한 '만종' 한국 상륙
오르세미술관전 '만종과 거장들의 영혼' 9월2일까지
김형순(seulsong) 기자
▲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3층 오르세전 전시장 입구, 홍보물과 파리 센 강변 오르세미술관 배경사진
ⓒ 김형순
오르세미술관전 '만종과 거장들의 영혼'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 4~5전시장에서 9월2일까지 열린다. 작가로는 밀레, 드가, 르누아르, 마네, 모네, 세잔, 고흐, 고갱, 시냐크, 로트레크, 피사로, 루소, 르동, 모로, 보나르, 뷔야르 등이 소개된다.

이번 특별전에는 밀레의 '만종',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을 포함 오르세미술관에서 엄선된 걸작 44점과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화가들 작업하는 모습을 주제로 한 오리지널 빈티지사진작품 30점을 선보인다.

'만종', 당분간 한국독점

단원의 그림이 수없이 복제가 되듯 밀레의 만종도 그렇게 수없이 복제되면서 우리생활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전후세대는 단원보다 밀레를 더 많이 보고 자랐는지 모른다. 그 가치여부를 떠나 어디서나 그냥 무심코 생각 없이 좋아서 본 것 같다.

이 한 작품 때문에 1천억 원의 보험금을 지불하긴 했지만 9월초까지는 당분간 지상에서 '만종'을 보려면 한국에 와야 한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밀레의 만종, 그 원본을 독차지해 보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 셈이다.

▲ 밀레, '만종' 캔버스에 유채 55×66cm 1857-1859. '만종' 한 작품의 보험금만으로 1천억 원을 지불했다.
ⓒ 김형순
밀레의 대표작 '만종', 왜 그리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일까? 아마 황혼녘에, 하루의 고된 일과를 보내고 조용히 기도하는 평화로운 농촌풍경 그것이 주는 감동과 여운 그리고 일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도감을 주기 때문일지 모른다.

밀레는 사회 변혁기, 계급의 심화 속에 부와 권력을 누리는 상류층보다는 빈곤한 농부를 그렸다. 당시로선 파격적 사건이었다. 계급 이전에 농민의 소박함과 진실함이 주는 감동을 화폭에 담아 지구촌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서민화가 박수근 화백도 그런 면에서는 밀레와 통한다. 그가 밀레를 그리도 흠모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인상주의, 격변기 속 태동

▲ 마네, '제비꽃 장신을 단 베르트 모리조' 모리조는 마네의 남동생 외젠의 부인으로 인상주의 여자화가였다. 캔버스에 유채 53×38cm 1872. 여성화가가 등장했다는 건 격변기임을 반증한다
ⓒ 김형순
인상주의 화가들이 1887년 첫 전시회를 갖기 전 프랑스사회는 보불전쟁과 제2제정몰락(1870), 파리코뮌(1871), 후에 드레퓌스사건(1898) 등 엄청난 격변기였다. 제국주의의 파급 속에서도 시민의식의 대두로 의무교육과 언론집회의 자유가 확보됐고 모리조 같은 훌륭한 여자화가도 등장했다. 그래서 인상주의의 탄생을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에서는 볼 수 없으나 르누아르의 '무랭 드 라 가레트에서의 무도회', 드가의 '압생트', 모네의 '1878년 6월30일의 축제'는 화려한 도시축제와 술 취한 여인 그리고 만국박람회 등 산업화과정이 빚은 시대풍속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대풍의 화려한 공연예술을 그린 드가의 '오페라 좌의 오케스트라(아래)'를 이번에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인상주의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랑받는 미술사조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이유는 아마도 빛을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리는 화법과 당시 사진술 영향 등으로 순간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화풍이 현대인의 정서와 맞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상주의 대부 마네

▲ 마네, '피리부는 소년' 캔버스에 유채 161×97cm 1866
ⓒ 김형순
'만종'과 함께 이번 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역시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다. 이 그림이 주는 단아한 구조 속 평면적 아름다움, 그 속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악기소리가 사람들 마음을 울린다. 동양미의 극치라 할 '정중동'의 멋을 서양미술의 명화에서 맛볼 수 있다니 아이러니다.

이번 전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작가는 역시 마네다. 그는 "허식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건 뭔가?"를 고민했다. 국립미술학교 출신이었으나 고전적 규범을 멀리하고 이론보다는 여행을 통해 거장들 작품을 접했다. 명암의 극단적 대조와 사회적으로 금기된 주제를 도입, 살롱전과는 다른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 등 도발적 화풍을 선보였다.

그는 당대 최고지성인이었던 졸라, 말라르메, 보들레르 등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전시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라며 당시 관전에서 소외된 젊은 작가들을 위해 자신의 아틀리에서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세잔, 모리조, 드가의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회화의 자율성을 주장하여 인상주의의 대부가 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

▲ 르누아르, '그림을 그리는 클로드 모네' 캔버스에 유채 85×60cm 1875
ⓒ 김형순
또 다른 인상주의 대가인 모네와 르누아르는 격조 있고 현란한 색채로 빛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두 사람은 한 살 차로 작업도 여행도 같이 하며 오랫동안 친분을 쌓았다. 르누아르가 모네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니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그림을 그리는 모네'를 통해 이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으니 정말 즐겁다.

모네는 보불전쟁 중 런던에 피해갔다가 터너의 풍경을 보고 감동을 받기도 했다. 전후엔 아르장퇴유에 정착하여, 물빛의 진동과 반사된 광선의 변화되는 순간을 밝고 투명한 색채와 유려한 필치로 물들였다. 이런 화풍은 수련연작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르누아르는 모네와 유사한 점도 많으나 전원보단 활기 넘치는 도심을 그렸고, 풍경화보다 인물화에 더 치중했다. 빛의 반사를 섬세하고 부드러운 터치와 눈부시도록 세련되고 우아한 색채로 구현했다. 특히 관능미 넘치는 풍성한 누드화에서는 남다른 천재성을 보였다.

▲ 드가 '오페라 좌의 오케스트라' 캔버스에 유채 56×46cm 1868-1870. 드가는 사진을 찍듯이 찰나를 그리는 화가였다
ⓒ GNC media, Seoul, 2007
잠시 법학도였던 드가는 "현대적 삶이 그날그날 보도하는 연대기 작가 같다"라고 말하면서 사회의 변동을 대변하듯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드가는 하나의 동작과 움직임을 어떻게 순식간에 포착해서 그림에 적용시키느냐로 고민했다. 발레 그림이 그렇고 1930년 영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스포츠인 경마장의 말 그림이 그렇다.

드가는 위 '오페라 좌의 오케스트라'에서 보듯 정적인 것보다는 순간적 움직임의 번뜩이는 율동과 리듬을 중시했다. 그래서 아주 극적이고 동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처럼 보인다. 음악과 무용을 미술과 연결시킨 건 바로 그런 점 때문일 것이다. 당시 사진술의 순간포착을 그림에도 적용했다. 드가는 이를 통해 '찰나를 그린 화가'라는 이름도 얻었다.

고흐, 고갱 그리고 세잔

▲ 고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캔버스에 유채 57×74cm 1889. 검소하고 단출한 고흐의 방은 관객에게 작가의 고단함을 연상시킨다
ⓒ 김형순
이번엔 고흐를 살펴보자. '고흐의 방'에서 보듯 그의 일상은 간소했지만 내면은 복잡했다. 이런 내면의 번뇌와 갈등을 그만의 강렬함과 살아 꿈틀대는 격렬함으로 빛과 광채가 마구 쏟아지는 세상을 창조했다. 사후에는 누구보다 많은 애호가가 생겼고 독일의 표현주의와 야수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전직 증권거래소 직원이었던 고갱은 문명세계에 염증을 느끼고 원시적 색채로 미의 순수성을 찾으려 했다. 고흐와 결별한 후, 1891년 타히티로 떠나면서 예술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나셨다. 떠나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명영향에서 벗어나 평온해지기 위해서 떠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오로지 순수한 예술뿐이다"

▲ 고갱, '타이히의 여인들' 캔버스에 유채 69×91cm 1891. 꾸미지 않는 원시적 미의 원형을 느낄 수 있다
ⓒ 김형순
이제 세잔을 보자. 그는 자연을 통해 영원성과 절대성을 추구했다. 원근법도 무시하면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자적 화풍으로 그림의 구조와 리듬을 일궈냈다. 아래 '푸른 꽃병'에서 암시하듯 세잔은 그림 속엔 인간의 눈에서 벗어난 뭔가가 있다고 말한다. 세잔의 사과그림이 흘러내려가야 할 때도 흘러내리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세잔은 마치 장인처럼 그림을 공들여 작업했다. 사물을 문명화된 눈에서 벗어나 어린이처럼 순수한 서정으로 보려했다. 작고 운동감 있는 필치로 작품에 생동감과 중량감을 살렸고 사물을 하나의 원구, 원기둥, 원뿔로 단순화시켰다. 결국 면과 선을 구조화하여 입체주의의 길을 열었고 그래서 20세기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 세잔, '푸른 꽃병' 캔버스에 유채 62×51cm 1889-1900. 사과가 흘려내려야 정상일 것 같고, 정지 속 격렬한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 김형순
그밖에도 지면상 시냐크, 로트레크, 피사로, 루소, 르동, 모로, 보나르 등을 다르지 못해 아쉽지만 좋은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

끝으로 '예술의 전당' 가는 길은 지하철 등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 그렇게 편치만은 않았다. 볼만한 전시회를 가는 길, 그 접근에 있어 불편함이 없었으면 한다. 우선 지하철과 전시장을 연계하는 셔틀버스라도 늘렸으면 좋겠고, 전시회 가는 길 내내 관객이 더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하도록 유도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