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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역사탐방

동작동 국립묘지의 옛 풍광

동작동 국립묘지의 옛 풍광

2009. 09. 28. (월)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화장사(華藏寺)라는 절이 있다. 지금은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라 불린다. 국립묘지가 들어서기 전에 이 일대의 모습이 어떠하였을까? 170년 전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기해년(1839) 여름 내가 더위와 장마로 고생하다가 가을이 되자 한 열흘 설사가 쏟아졌는데 약을 먹으니 조금 멈추었다. 묵은 병이 자주 도져서 봄이 되도록 이부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 술만 떠도 배가 부르고 한밤이 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걷다가 열 걸음에 세 번 자빠졌다. 날마다 괴롭고 견디기 어려워 스스로 약으로는 어찌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였다.

산과 강에서 답답함을 푸는 것이 인삼이나 복령보다 나을 듯하지만, 병든 몸을 생각하니 먼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듣자니 노량 나루 남쪽에 화장사(華藏寺)가 있는데 놀 만하다 하기에 유경형(兪景衡, 유신환(兪莘煥)), 김위사(金渭師, 김상현(金尙鉉))와 함께 행장을 꾸려 하룻밤 자고 오기로 약조하였지만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두 번이나 약속이 취소되었다.

늦여름 유월 초사흘에 날이 개고 햇살이 퍼져 따스하기가 사람에게 딱 맞았다. 두 벗이 소매를 펄럭이며 나란히 우리 집에 이르렀다. 이미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날아갈 마음이 들게 하였다. 위사가 말하였다. “약속을 하였으니 감히 어길 수 없겠지만, 산을 넘고 물을 건너자면 힘이 들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이곳에 머물면서 하룻저녁을 보내시지요.” 내가 흥분하여 말하였다. “나는 갈 것이네. 자네들은 젊고 병이 없는데, 이 늙은이 때문에 한 번 움직이는 것을 꺼리시는가?” 모두들 껄껄 웃었다.

나는 가마를 타고 위사는 말을 타고 경형과 인아(寅兒)1)는 걸었다. 하인 둘은 가볍고 무거운 짐을 맡았는데 간장 한 병, 쌀 한 자루, 피리 한 자루, 먹 하나, 중국 종이 수십 장, 동파시(東坡詩) 두 질 등이다. 나와 위사는 먼저 나루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곧바로 건넜다. 수면이 거울처럼 맑았다. 용양정(龍驤亭)2) 아래에서 섶을 깔고 앉아 일행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위사가 하인과 노새를 도성 안으로 돌려보내었는데, 산길이라 노새를 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산을 따라 왼편으로 가서 흑석촌(黑石村)을 지나 험준한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몇 리를 갔다. 처마와 기와가 나타나더니 절문의 현액 글자가 보였다. 승려 몇이 나와 맞이하여 길을 안내하여 불이정(不二亭)에 올라 자리를 깔고 앉게 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조망하였다. 고운 봉우리가 오른쪽을 감싸고 맑은 강이 왼쪽에 갈라져 흘렀다. 대단한 볼거리는 없지만 좋은 사원(寺院)이라 일컬을 만하였다.

조금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의 행색을 보니 땀을 줄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손으로 어지럽게 부채질을 하였다. 두 벗은 술과 국수를 따로 장만해왔는데 아랫사람들에게까지 줄 만큼 넉넉하였다.

저녁이 되자 바람이 사나워졌다. 정자에서 내려와 길을 꺾어 조그만 두 개의 사립문을 지나니 장실(丈室)이 나왔다. 방의 창살은 호젓하고 돗자리는 깔끔하였다. 감실에 금부처 하나를 모시고 있었다. 그 아래 향을 사르는 오래된 청동화로가 놓여 있는데 그 모습이 자그마하면서도 조형이 매우 정교하였다. 불경 몇 질이 그 오른편 서가에 놓여 있었다. 동쪽 담장 아래 복숭아나무 대여섯 그루가 막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 울긋불긋하게 어리비치고 있었다. 뜰은 그다지 넓지는 않은데 포도 넝쿨과 석류 화분, 아름다운 꽃나무와 괴석이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어 자못 운치가 있었다. 이 모두가 장로(長老) 정심(淨心)이 조금씩 장만한 것이라 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순수하고 근실하여 취할 점이 있었다.

조금 있으니 밥이 들어왔다. 밥은 완두콩으로 지었다. 반찬은 다시마인데 삶고 데친 것이 법식에 맞아 향긋하고 기름져서 고기를 대신할 정도였다. 반 사발을 먹으니 배가 불렀는데 예전에 그런 일이 없었다. 샘물을 떠서 입을 헹구니 단맛이 제호(醍醐)에 비길 만하였다. 급히 차를 끓이게 하여 통쾌하게 한 사발을 들이켰다.

다시 정자로 나와 서성이는데, 갑자기 엷은 흰빛이 옷에 생겨났다. 위를 쳐다보니 초승달이 숲 끝으로 나와 곱디고운 빛을 뿜고 있었다. 내가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만일 처음 기약한 날에 왔더라면 이러한 달빛을 놓치지 않았겠나. 하늘이 마음써주심이 은근하니, 머리를 조아려 감사의 글을 올려야 하겠네.” 한참 산보를 하다가 방으로 돌아와 《동파집》을 뒤적이다〈호구사(虎邱寺)〉시에 차운하여 급히 시를 지었다.3) 둥글게 앉아서 실컷 회포를 풀다보니 촛불 두 심지가 다 탄 것도 알지 못하였다.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물었더니 정심 스님이 문밖으로 나가서 별을 보고 돌아와 말하였다. “산중이라 시각을 알리는 종이나 물시계가 없어 정확히 말하지 못하겠지만, 대략 5경 무렵인 것 같습니다.” 내가 “내가 즐거워 피로하지 않소. 그러나 그 기를 거칠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옛 가르침이라네. 조금 정력을 아껴두어서 말짱한 정신으로 내일 아침을 맞는 것이 좋지 않겠나.”4)라 말하였다. 마침내 각기 침소로 가서 깊이 곯아떨어졌다.

창이 훤하게 밝아올 때 일어나 세수를 하였다. 사람들이 막 서쪽의 조그만 요사채에서 밤에 지은 시를 읊조리고 있어 웅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가득 들렸는데 소란하여 불편하였다. 시렁 위에 있는 《금강경(金剛經)》 한 권을 집어다가 조용히 뒤적거렸다. 심오해서 이해되지 않는 곳이 많았지만 이해가 되는 곳은 종종 훤한 깨우침이 있었다.

이윽고 여러 사람들이 글을 완성하여 가지고 와서 베꼈다. 성률과 품격이 모두 아름다웠다. 인아가 지은 것도 두 벗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내가 또 그 아래 절구 두 수를 쓰고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집에 돌아가 화답을 하게 하였다.

하인이 밥이 다 되었다고 고하였다. 밥을 먹은 후에 발길을 돌리려는데, 보니 절간의 주방이 적막하여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 곁의 승려들을 보니 얼굴색이 모두 누렇게 떠서 밥을 먹지 못한 지 하루 밤낮은 되어 보였다. 자루 속의 남은 양식을 꺼내어 시주하였다. 모두들 합장하고 감사하다고 하면서 산모퉁이까지 전송을 나왔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표정들이었다. 단풍 들 철에 다시 오겠다고 하니, 모두들 한 목소리로 반드시 오시라고 청하였다. 밥 한 끼의 인연이 이 정도인가? 집에 도착하니 해가 중천에 걸렸다.

이번 여행은 세 가지 얻은 것이 있었다. 첫째, 사찰과 산수는 모두 빼어난 볼거리라 할 만하다. 어떤 짐승은 이빨만 뛰어나고 어떤 짐승은 뿔만 뛰어나니 이 둘을 겸할 수는 없는 법, 땅이 너무 드러나 있으면 닭과 개 울음소리가 가까운 것이 싫고, 땅이 너무 궁벽지면 수레나 말을 타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치러야 한다. 이 산은 그다지 깊지도 얕지도 않아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면 바로 왁자지껄한 속세와 멀어질 수 있다. 산을 오르거나 물을 건너기에 모두 딱 적당한 곳을 찾자면 바로 여기라 하겠다.

둘째, 그저 너무 적막한 것을 면하려고 여러 사람을 불러 모으다가는 다툼이 일어나기 쉽다. 두 명의 벗과 아이 한 명이면 충분한 성원이 된다. 경형은 뜻이 굳고 마음이 고요하여 겹겹의 관문을 뚫을 만한 공력을 지녔다. 위사는 정신이 탁 트이고 칼날처럼 날카로워 만 리 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기상이 있으며 봄빛에 꽃이 만발하여 겨울이 되어도 시들지 않을 듯하다. 인아는 어린 새가 지저귐을 배우는 듯 또한 수창에 참여하였다. 일행 모두가 제대로 되었다 하겠다.

셋째, 임금이 편안하고 신하가 수고로우면 막힌 것이 뚫리고 더러운 것이 제거되듯 어려운 일이 술술 풀리고, 잠자리가 아름답고 음식이 맛나면 심신이 조화롭게 되는 법이니, 어찌 천운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꼭 그렇다고 단언을 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 이러한 공을 아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물이 찬지 뜨거운지는 직접 마셔봐야 아는 법인데, 위사는 무슨 걱정을 그리 지나치게 하였던가? 이 모두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경자(庚子) 욕불일(浴佛日 석가탄일)에 대산거사(臺山居士)가 기록한다.

1) 김매순은 김정순(金鼎淳)의 아들 김선근(金善根)을 후사로 들였는데, 여기서 인아는 김선근의 아명인 듯하다.
2) 정묘가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할 때 노량진(露梁津)에 주교(舟橋)를 설치하고 망해정(望海亭) 터에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지었는데 용양정은 이를 가리킨다.
3) 김매순의 《대산집》권3에〈동파의 호구사 시운에 차운하다(拈東坡虎邱寺韻)〉
4) 맹자(孟子)가 부동심(不動心)을 논하면서 “지(志)는 기(氣)를 부리는 장수이고, 기는 몸을 채우고 있는 것이니, 지가 첫째요 기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그 지를 확고히 세우고도 또 그 기를 거칠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夫志氣之帥也, 氣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持其志, 無暴其氣).”라 하였다.

▶ 동작진도 중에서(지금의 국립묘지 부분을 묘사)_겸재 정선_간송미술관 소장
▶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도록(범우사) 인용

- 김매순,〈화장사를 유람하고서(遊華藏寺記)〉《대산집(臺山集)》

[해설]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은 김창흡(金昌翕)의 후손으로 조선말기 장동김씨(莊洞金氏)을 대표하는 학자이며, 홍석주(洪奭周)와 함께 가장 높은 수준의 고문(古文)을 시범한 작가이기도 하다. 의론문을 잘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위의 글은 글자를 잘 다듬어 참신하고 활발한 묘사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매순은 파란 많은 인생사, 65세의 노경에 병마에 시달렸다. 6월 20일 병으로 세상을 떴으니, 6월 3일 한강을 건너 화장사를 찾은 것은 이생의 마지막 여행이었으리라. 노환에 약이 듣지 않아 차라리 바람이나 쐬러 가는 것이 좋다고 여겨 그리 멀지 않은 화장사를 찾은 것이다. 아들과 제자 유신환(兪莘煥, 1801-1859)과 김상현(金尙鉉, 1811-1890)만 데리고 간 단촐한 나들이였다.

지금은 국립서울현충원 안에 편입된 화장사는 조선시대 그리 알려진 사찰이 아니었다. 그 흔한 시나 산문도 이 글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죽음을 앞둔, 한 시대의 대문장가가 마지막 심혈을 기울여 지은 이 글로 국립현충원 일대의 옛 풍광이 현대인의 기억으로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화장사에 있던 불이정(不二亭), 불교의 이치가 둘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 것이겠지만, 화장사가 호국지장사로 바뀌었으니, ‘불이’를 나라를 위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풀이하여 화장사 앞에 불이정을 지어 나라를 위한 마음을 굽이쳐 흐르는 한강물과 함께 보게 하였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