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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는다. 굉장히 훌륭한 작품에 열연한 배우가 많다고 들었다. 내게 그 여배우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설 자격과 영광을 준 칸 영화제와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을 이창동 감독이 가능하게 했다. 송강호씨…. 강호 오빠때문에 신애가 완전해져 감사한다. 믿을 수 없다…." 지난 27일(이하 현지시각), 제60회 칸 국제영화제 마지막 날 시상식장에 선 배우 전도연은 말했다. 저녁 7시 30분에 막을 연 시상식이 30분여 지난 8시경 심사위원장 스티븐 프리어즈가의 입에서 전도연의 이름이 불리자 전도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웃음만 지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 이창동 감독이 가능하게 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창동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미소로 전도연을 품에 꼭 안아 진정시켰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프랑스의 배우 알랭 들롱이 상을 전달하자 몇 차례 "아…" 하는 짧은 신음소리만 되풀이할 만큼 전도연은 믿을 수 없어 했다. 전도연은 그러나 마이크 앞에 서자마자 '봉수아'라고 인사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전도연의 수상 소감에서 송강호의 이름이 불리자 파안대소한 송강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 관객에 인사하기도 했다. "<밀양>을 환영해준 칸의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전도연의 인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소감을 마친 전도연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싼 들롱은 볼에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세계의 여배우'를 향한 경외를 표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기념촬영을 마쳤다. 기념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시상식을 생중계한 프랑스의 유료 인기채널 <카날 플뤼스>의 내레이터는 전도연을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배우'로 소개하며 김기덕 감독의 <숨>과 함께 올해 칸 영화제에 두 편의 영화를 경쟁부문에 올린 한국영화의 저력은 "한국 정부의 역동적인 지원제도에서 나온 것"이라 부연설명했다. 내레이터가 지적한 '지원제도'는 물론 지난 4월 초 체결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선결조건으로 '박살난' 스크린쿼터 제도였다. "최우수 여우주연상? 너와 같은 나라에서 온 배우"
우렁찬 박수소리가 잦아들 무렵 들롱은 다시 제인 폰다, 잔 모로, 나탈리 바이 등 전세계 영화역사에 이름을 새긴 여배우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늘 저녁' 수상할 여배우에게 이들의 영광을 기원하기도 했다. '오늘 저녁'의 여배우는 전도연이었던 것이다. 이날 시상식 마지막에서 세 번째 수상의 주인공이었던 전도연은 60주년 특별상을 수상한 칸 영화제의 단골손님 구스 반 산트, 그리고 대망의 황금종려상의 주인공 크리스티안 문기우 감독이 차례로 단상을 지나간 뒤 모든 수상자들과 함께 다시 한 번 무대로 나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관객의 박수소리를 음미했다. 인어를 연상시키는 은빛 드레스 차림의 전도연은 관객의 박수 속에서 아름다웠다. 시상식 당일 오후 프랑스 일간지 기자들을 중심으로 수상 작품에 대한 정보를 물어봤다. 이들은 "최우수 여우주연상이 누구라는 건 안다"며 "너와 같은 나라에서 온 배우"라고 하나같이 대답했다. 나머지 수상작품은 알 수가 없다는 대답도 한결 같았다. 전도연은 그만큼 확실한 연기를 보여줬던 걸까. 지난 24일 <밀양>이 공식 공개된 뒤 프랑스의 무료신문 <메트로>, 미국의 <뉴욕타임즈>도 전도연의 수상을 장담한 바 있다. 이변은 없었다. 전도연은 전세계의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상을 품에 안았다. 이로써 <밀양>은 지난 2002년 감독상에 빛나는 <취화선(임권택)>, 2004년 심사위원대상의 <올드보이(반찬욱)>에 이어 칸 영화제에서 본상을 수상한 세 번째 우리영화가 됐다. 칸에서 여우주연상은 전도연이 처음이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한국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탄 것은 전도연이 두 번째로 <씨받이(1987, 임권택)>의 강수연이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이후 20년 만이다. "한국의 영화 저력은 역동적 지원제동에서" 좋은 영화가 좋은 배우를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좋은 배우가 없다면 좋은 영화도 불가능하다. 이날 저녁 '좋은 영화' <밀양>을 통해 전도연은 세계적 배우로 다시 태어났다. 바꿔 말해 전도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뛰어난' 영화 <밀양>은 칸에서 재탄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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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 전, 난 이 영화 <밀양> 포스터에 강하게 매료되었다. 처음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 포스터에 먼저 강하게 이끌린 것은. 당시 영화내용이나 줄거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픈 표정과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애틋한 표정 그리고 '이런 사랑도 있다'는 영화 카피를 보고서 어렴풋한 '감'이 전해져왔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편으론 좀 김이 새기도 했다. 흔하디 흔한 남녀의 사랑이야기 말고 내심 다른 무언가를 기대했었던 것일까. 작가주의로 잘 알려진 이창동 감독이 장관직에서 물러나 처음 만든 작품인데다 주변의 지대한 관심 등으로 인해 이 영화에 대해 한껏 환상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철학적이고 심오하고 원대하고 뭐 그런 주제에 관한 것. 그러나 한편으론 참 궁금했다. '이런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남녀의 사랑이 다 그게 그거지 이런 사랑, 저런 사랑이라 구분지을 만한 게 또 어디있단 말인가. 포스터에 강하게 끌리다 영화를 중반부쯤 볼 무렵, 내가 기대했던(?) 심오하고 복잡한 주제가 등장하는 듯 했다. 인간의 신을 향한 구원, 인간이 인간을 용서한다는 것의 의미, 인간의 도덕성과 순결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이중적 모순 등. 갑자기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보는 듯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애매모호한 대답만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진정,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신일까? 절대자일까? 진리일까? 믿음일까? 이해와 용서일까? 아마도 그 대답이 '신'이 되었다면 이 영화는 한 특정 종교적 주제에 충실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은 종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신의 충실한 사도로서 살기에 자신의 욕망에 너무 충실한 '인간'이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분노와 괴로움, 슬픔, 억압을 무조건 덮어두고 묻어두기엔 가련하고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고통과 슬픔을 표출하고 싶어했고, 이해받길 바랐다. 아마도 그것이 신애가 세상과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 옆에서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그녀의 고통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다. 아들의 사망신고서를 접수한 뒤 얼이 나간 듯 거리를 활보하던 신애가 가게 된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부흥회' 장면을 관객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 목사의 설교와 찬송을 배경으로 꺽꺽대며 울음을 삼킬 듯 참고 있다가 한순간에 폭발하듯 터져버리던 신애의 통곡소리를. 그런 신애의 뒤에 종찬이 처연한 표정으로 신애를 보고있다. 보이지 않는 햇빛처럼 '그녀'를 감싸는 '그'
'사랑해' '좋아해'라는 말은 고사하고 그녀로부터 늘 힐책만 당하는 그는, 눈에 띄게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늘상 존재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섣부른 위로나, 격려 한 마디 하는 법이 없다. 그저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그녀가 '속물'이라고 놀려대도 그저 사람좋은 웃음으로 지나가버리는 그다. 종찬의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난 장면이 있다. 유괴범을 면회하고 난 뒤 혼란을 겪은 신애가 유괴범에게 전화가 왔다고 종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는 장면이다. 종찬은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진정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전화를 걸어 알았다며 자기가 내일 교도소에 전화를 걸어 자세히 알아보겠다고 말하며 신애를 안심시킨다. 그 장면이 인상깊었던 이유는 종찬이야말로 신애라는 인물의 아픔과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라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방 아가씨에게 싱거운 농담따먹기나 하며 가짜 가죽재킷으로 온갖 폼을 다 잡고 '회장님'들을 깍듯이 모시는 '속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에 비견되는 인물군이 있다. 인간의 이중성과 위선적인 면을 감추고 있는 은혜약국의 '장로님'을 비롯한 인물군이다. 다시 영화의 한 장면. 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악에 받친 신애가 야외예배를 보는 현장에 가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크게 틀어놓자 기도를 하던 신도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예배분위기에 방해(?)될까봐 서로 눈치만 본 뒤 다시 기도하는 척 한다. 신애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며 현장을 빠져나가고 다시 분위기는 재빨리 수습되지만 인간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 장면이었다. 정말 믿음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냐, 그렇다면 하늘을 향해 맹세해보라고 다그치는 신애의 추궁에 아무말 못 하고 우물쭈물해하던 '속물' 종찬의 모습이 더 진솔하고 인간적이지 않은가. 이 영화는 내가 기대했던 대로 대단히 철학적이고 심오했다. 아마 이 영화에 가끔 등장하는 '하늘'만 놓고 글을 쓴다고 해도 너끈히 몇 장은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상징과 함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 모티브는 몇 개 더 있다. 햇빛도 그러하고 머리칼도 그렇다. 거울도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땅 역시 그렇다. 한 마디로 영화 자체가 매우 관념적이고 철학적이다. 깊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렁에 빠지듯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는 것이 이 영화 <밀양>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그러나 아무리 심오한 관념의 뜻을 좇고 상징물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분석한다고 해도 결론은 한 방향으로 귀결지어진다. 바로 앞서 '흔하디 흔한' 것이라 하찮게 표현했던 사랑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인가. 아무리 세상의 밑바닥까지 가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사랑과 이해로 인해 용기를 얻고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감독은 '신애가 종찬의 사랑으로 인해 삶의 힘을 얻었다'고 직설적으로 말하기를 끝끝내 조심스러워하는 듯 했다. 그리고 아주 의미심장한 마지막 장면. 더러워져 오물투성이가 된 땅에도 한 조각 따스한 햇볕이 여전히 따뜻하게 비치고 있음을 보여준고있다. 눈에 띄지 않지만 항상 신애를 비밀스럽게 감싸고 있는 종찬처럼. 영화를 보고 난 후 신애라는 여자를 생각해봤다. 신애, 왜 하필 이름이 신애일까. 처음에는 신애(神愛) '신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닐까 했는데, 나중에는 신애(信愛)로 정정하기로 했다. 신애, 사랑을 믿는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믿는다는 뜻이 아닐까. 인간은 인간의 사랑으로인해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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