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무려 13년간의 개고를 통해 완결판이 나왔다. 마치 분재를 다듬는 정성으로 조탁한 일본어 표현은 당대 최고의 예술적 성취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여행지에서 매력적인 두 명의 여성과 조우하는 시마무라는 무릇 남성의 꿈과 환상을 대신 구현하는 존재다. 산행 길에 우연히 찾아든 온천 마을에서 게이샤(藝者) 고마코를 만난 시마무라는 그녀의 청결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세 차례 방문하게 된다. 고마코도 시마무라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키워간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고마코의 사랑이 현실적인 크기로 다가왔을 때 시마무라는 온천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결국 시마무라가 추구한 것은 현실적인 사랑이 아닌 도회의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게 해 주는 감미로운 환상이었다. 이 소설은 중편 이상의 분량을 지녔지만 이렇다 할 만한 줄거리도 없다. 주제는 모호하고 인물의 성격도 뚜렷하지 않다. 주고받는 예사로운 대화를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수묵화의 여백을 감상하는 것 이상의 내공을 요한다. 이 정도면 “몇 번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는 ‘용감한’ 고백이 일본인 독자 사이에서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가와바타의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 제목을 비아냥거리듯, 26년 후 같은 자리에서 ‘모호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수상연설을 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도 분명 그러한 독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연설 제목에 나오는 ‘아름답다’와 ‘모호하다’는 두 개의 형용사야말로 이 소설의 특징을 적확하게 짚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결여된 점이 적지 않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오랫동안 읽히는 이유는 작가의 섬세한 미의식과 감각적인 문체 때문일 것이다. 전편에 걸쳐 펼쳐지는 자연의 정경 묘사는 거의 시의 영역에 미쳐 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밤하늘의 은하수에 대한 묘사는 그 정점을 보여준다. 등장인물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다. 작품 속에 그려지는 고마코와 요코는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이 점에서 ‘설국’은 동양적 정신세계의 요체를 현대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게이샤, 온천, 후지산 등의 대상은 한두 세기 전부터 서양에서 일본에 대한 환영(幻影)을 만들어 내는 데 쓰인 대표적인 재료이다. 설국이 눈으로 인해 외부로부터 고립된 세계라면, 소설 ‘설국’은 고유의 풍토와 전통 그리고 번역을 완강히 거부하는 일본어 문체로 세계문학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설국’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은 비서구 세계를 ‘신비’의 영역에 가둬두고자 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설국’은 이른바 ‘일본적 미학’에 대한 신화를 추인(追認)하고, 나아가 그것을 범세계적으로 증폭시키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윤상인 한양대 교수 일본언어문화학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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