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중추부사(判中抽府事) 신(臣) 이황(李滉)은 삼가 재배(再排)하고 아룁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도는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하도낙서(河圖洛書)가 나옴에, 성인이 이것을 근거로 괘효(卦爻)를 지은 뒤로부터 도가 비로소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도는 넓고 넓으니 어디서부터 착수하여야 하며, 옛 교훈(古訓)은 천만 가지나 되니 어디서부터 따라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성학에는 큰 실마리가 있고, 심법에는 지극한 요령이 있습니다. 이것을 드러내어 도(圖)를 만들고, 이것을 지적하여 설(說)을 만들어, 사람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入道之文)과 "덕을 쌓는 기틀(積德之基)"을 보여 주는 것은 역시 후현(後賢)들이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임금된 분의 한 마음(一心)은 온갖 정무(萬幾)가 나오게 되는 자리이며 온갖 책임(百責)이 모이는 곳이며 뭇 욕심이 갈마들며 침공하고, 뭇 간사함이 갈마들며 침해하는 곳입니다. 그 마음이 만일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지면서 방종하여 간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과 같아서, 그 누구도 이것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옛날의 성스럽고 현명한 황제(聖帝)나 군왕(明王)은 이러한 점을 걱정하여,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로 하루하루를 삼가 지내면서도 오히려 미흡하다고 여긴 나머지, 스승이 되는 관원(師傳之官)을 세우는 한편 바른 말을 간하는 직책을 두었고, 전후좌우에 의승(疑丞) 보필(補弼)이 있게 하였습니다. 수레를 탈 때는 여분(旅賁)의 규(規)가 있었고, 조회 때에는 관사(官師)의 법이 있었으며, 안석에는 훈송(訓誦)의 간(諫)이 있었습니다. 침실에는 근시(近侍)의 잠언(箴言)이 있었고, 일을 처리할 때는 고사의 인도함이 있었으며, 한가로이 있을 때는 공사(工師)의 송(誦)이 있었습니다. 소반이라든가 밥그룻, 책상, 지팡이, 칼, 들창문에 이르기까지 무릇 눈길이 닿는 곳과 몸이 처하는 곳에는 어디나 명(銘)과 계'(戒)가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 마음을 유지하고 몸을 방범(防範)하게끔 하는 것이 이토록 지극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덕이 날로 새롭고 업(業)이 날로 번창하여, 티끌만한 허물도 없게 되고, 나아가 큰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후세의 군주들이란 하늘의 명을 받고 왕위에 오른 만큼 그 책임이 지극히 크고 무겁건만 어떻게 되어서인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게끔 하는 것은 하나도 이 같이 엄정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면서도 불손한 태도로 스스로 성자인 체 하는가 하면 오만한 태도로 왕공과 수많은 백성들의 위에서 방자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결국 괴멸하게 되는 것이야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남의 신하가 되어 임금을 도에 합당하도록 인도하려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그 마음을 여러 모로 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장구령(長九齡)이 [금감록](金鑑錄)을 올린 것과 송경(宋璟)이 [무일도](無逸圖)를 드린 것과 이덕유(李德裕)가 [단의육잠]을 바친 것, 진덕수(眞德秀)가 [빈풍칠월도]를 올린 것 등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금심하여 마지않는 갖은 충정과 선을 베풀고 가르침을 드리는 간곡한 뜻이므로, 임금이 마음에 깊이 새겨 경복(敬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추한 몸으로 여러 대의 임금님께 받은 은혜를 저버린 채, 병든 몸으로 농촌에 틀어박혀 초목과 함께 썩어 가길 기약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헛된 이름이 잘못 전하여져 강연(講筵)의 중임(重任)을 주어 부르시니 떨리고 황송하옵니다. 사양하고 피할 길이 없는데다 이미 이 자리를 면하지 못하고 욕되게 한 이상, 성학을 권도(權導)하고 신덕(宸德)을 보양하여 요순 시대의 융성을 이룩하려는 일만은 비록 사양하려 하여도 할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신은 학술이 거칠고 성기며 언변이 서투른데다 질병까지 잇달아 시강(入侍)조차 드물게 하였는데, 겨울철 이후로는 그것마저 완전히 그만두었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여 보니, 처음에 글을 올려 학문을 논한 것들이 이미 전하의 뜻을 감동 분발시킬수 없었으며, 나중에 직접 대하여 여러차례 아뢴 말씀 또한 전하의 슬기에 도움을 드릴 수 없었으므로, 보잘 것 없는 신의 정성으로는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옛 현인과 군자들이 "성학'을 밝히고 "심법"을 파악하여 "도"와 "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문(入道之門)"과 "덕을 쌓는 기초(積德之基)"를 보여주는 것이 마치 해와 별같이 밝게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으므로, 이에 감히 이것들을 가지고 나아가 아룀으로써 옛 대왕들의 공송(工誦)과 기명(器銘)이 남긴 뜻에 대신하고자 하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마도 과거를 본받아 장래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이에 옛것 중에서 삼가 더욱더 두드러진 것을 가려 뽑은 것이 일곱 가지 도(圖)입니다. 그 중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는 "정씨도"를 토대로 신이 만든 두 가지 작은 도(小圖)를 덧붙인 것입니다. 그밖에 세 개의 도는 비록 신이 만들었지만, 그 글(文)과 뜻(志)의 조목과 규획은 한결 같이 옛 성현들께서 한 것이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합하여 [성학십도](聖學十圖)로 만들었는데, 각 그림 밑에는 외람되나마 저의 설을 붙여 보았습니다. 삼가 정서하여 사람 편에 올리옵니다.
하온대 신이 추위와 질병에 묶인 채 몸소 이것을 하려 하니 눈이 어둡고 손이 떨려 글씨가 단정하지 못하며 글의 줄과 글 크기가 모두 규격에 맞지 않습니다. 다행히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이것을 경연관(經筵官)에게 내리시어 바로잡을 논의를 더 많이 하게 하는 동시에 틀린 곳을 고치고 보충하게 하신 다음,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정본(正本)을 정사(精寫)토록 하시기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그 정본을 해당관서에 의뢰하여 병풍 한 벌을 만드셔서 평소 한가롭게 지내시는 곳에 펼쳐 두시도록 하거나 또는 따로 조그마한 수첩을 하나 만들어 항상 궤안에 놓아 두고 기거 동작하실 때 언제나 보고 살피셔서 경계하신다면 충성을 바치려 하는 신의 뜻은 다행스럽기 이를 데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 중에 다 드러내지 못한 것을 신이 지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찍이 듣건데 맹자는 "마음의 기능(心官)은 생각(思)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이해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홍범](洪範)을 진술할 때에도, "생각하는 것을 예(睿)라 하는데, 예는 성인을 이룩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마음이란 방촌(方寸)에 있는데 지극히 허(虛)하고 영(靈)한 것입니다. 이(理)야말로, 도서(圖書)에 드러나 있지만, 지극히 허령한 마음으로 지극히 확실하고 알찬 이(理)를 구하면 틀림없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면 이해되고", "예(睿)가 성인을 이룩한다"는 것이 어찌 오늘날이라 하여 증명될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영묘한 마음이라 해도 만일 마음의 주재하는 능력이 없으면 일을 앞에 당하여 놓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이(理)의 드러남이 확실하더라도 만일 찾아서 처리하려는 생각이 없으면, 항상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또한 도해를 토대로 생각하는 것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듣건대,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두워지고, 생각만 하면서 배우지 않는다면 위태로워진다"고 하였습니다. 배움(學)이란 그 일들을 익혀(習事) 참되게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큰 학문(聖門之學)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생각하여 그 미묘한 점에까지 통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고서도 그 일을 익히지 않으면 위태로워 불안하므로 반드시 배워가지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생각(思)과 배움(學)은 서로 계발(相發)하고 서로 도움(相益)을 주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이치를 깊이 살피시고, 모름지기 먼저 뜻(志)을 세워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我)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이 순과 같이 되게 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분발하여 생각과 배움의 두 가지 공부에 힘을 쓰셔야겠습니다. 그런데 "지경"(持敬), 즉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란 곧 생각과 배움을 겸하고 동과 정을 일관하고 안(마음)과 밖(행동)을 합치시키고, 드러난 것(顯)과 숨겨진 것(微)을 한 가지 되게 하는 도리입니다.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방법은 반드시 이 마음을 제장정일(齊莊靜一)한 속에서 보존하고, 이에 대한 이치를 학문사변(學問思辨)하는 사이에 궁리하며, 남이 보지도 듣지도 않는 곳에서 "계구", 즉 자신을 경계하며 두려워하는 것을 더욱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하며, 혼자만 있는 은밀한 곳(隱微幽獨之處)에서는 "성찰", 즉 자신을 되돌아보고 살피는 일을 더욱더 정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도해(圖)에 입각하여 생각할 때에는 그 도해에만 집중적으로 전념하여 마치 다른 도해가 있다는 것은 모르는 듯이 하여야 하며, 어느 한 일을 익힐 때는 그 일에만 전념하여 마치 다른 일이 있는 것은 모르는 듯이 해야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함없이 그렇게 하여야 하고 오늘과 내일 매일매일 계속하여야 합니다. 혹은 새벽녘 정신이 맑을 때(夜氣淸明時)에 되풀이하여 그 뜻을 음미하여 보기도 하고, 혹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응대할 경우에도 그것들을 경험하면서 키워가셔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처음에는 혹 부자유스럽고 모순되는 난점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때로는 극히 고통스럽고 불쾌한 일들도 없지 않겠으나, 이러한 것은 바로 옛 사람들의 이른바 "장차 크게 나아갈 기미(大進之幾)"이며 또한 "좋은 소식의 징조(好消息之端)"이니, 절대로 이로 인하여 그만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더욱더 자신을 가지고 힘을 기울이게 되면, 자연히 마음과 이(理)가 서로 영향을 미쳐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을 환히 꿰뚫 듯 이해하게 되고, 익히는 것(習)과 그 익혀진 일이 서로 익숙하여져서 점차로 순탄하고 순조롭게 행하여지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각각 그 한가지에만 전념하던 것이 끝내는 모두 일치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맹자가 말한 " 학문을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자기에게) 깨닫는 경지(深造自得之境)"이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만두지 못할 경험입니다. 또 이에 따라서 부지런히 힘써 나의 재능(吾才)을 다하면 안자(顔子)의 인을 어기지 않는 마음과 나라를 위하는 사업(爲邦之業)이 다 그 속에 있게 될 것이며, 증자(曾子)의 일관된 충서(忠恕)와 전도의 책임이 그 몸 자신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외경(畏敬)"의 태도가 일상생활 중에서 떠나지 않으면 "중화(中和)"에 의한 만물의 "위육(位育)"의 공(功)을 이룩할 수 있으며, "덕행"이 이륜(人倫)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천인 합일"의 묘한 경지도 마침내 이룰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도라 하여 만들고 설이라 하여 지은 것이 겨우 열폭의 종이에 늘어놓은 데 불과하며, 생각하시고 익히시는 것이 단지 평소 한가로운 곳(燕處)에서 하는 공부에 지나지 않지만 도(道)를 깨달아 성인을 이루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베푸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오직 전하께서 이에 시종 유의하시어 하찮다고 소홀히 하신다거나 귀찮고 번거롭다고 치워 버리지 않으신다면, 나라(宗社)의 다행이며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신이 초야에 묻힌 야인으로서 근폭(芹曝)을 올리는 정성으로 전하의 위엄을 모독하는 것임을 무릅쓰고 바치나이다. 황송하옵고 송구하올 뿐입니다.
성학십도
성학십도해설 | 조선 중기의 학자 이황(李滉)이 1568년(선조 1) 12월 왕에게 올린 상소문. 1책. 목판본.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도(道)에 관한 학문의 요체를 도식으로 설명하였다. ≪퇴계문집≫ 중 내집(內集) 제7권 차(箚)에 수록되어 있다. ‘ 성학십도’라는 명칭은 본래 〈진성학십도차병도 進聖學十圖箚幷圖〉로 ≪퇴계문집≫ 내집과 ≪퇴계전서≫에 수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진(進)·차·병도의 글자를 생략해 〈성학십도〉로 명명되고 있다. 진은 〈성학십도〉의 글을 왕(王 : 宣祖)에게 올린다는 의미이고, 차는 내용이 비교적 짧은 글을 왕에게 올린다는 뜻으로 일명 주차(奏箚)·차문(箚文)·차자(箚子)·방자(膀子)·녹자(錄子)라고도 한다. 병도는 도표(圖表)를 글과 함께 그려 넣는다는 뜻이다. 성학이라는 말은 곧 유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로 성학을 풀이하고 있다. 이는 곧 넓은 의미의 성학으로 해석된다. | 작업중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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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學十圖]에 나타난 退溪의 心學世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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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一 太 極 圖
無極이면서 太極이다, 太極이 움직이면 陽이 생기고, 움직임이 다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陰이 생긴다. 고요함이 다하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陰으로 갈리고, 陽으로 갈리니, 兩儀가 이루어 진다. 陽이 변화하고 陰이 더하여져서 水, 火, 木, 金, 土가 생기고, 五氣가 차례대로 펴지어 四時가 돌아가게 된다. 五行은 하나의 陰陽이요, 陰陽은 하나의 太極이요, 太極은 본래 無極이다. 五行의 생겨남에는 각각 그 性을 하나씩 나누어 가지니, 無極의 眞理과 二五의 精이 묘하게 합하여져서 한데 뭉친다.
乾의 이치에서 男子가 되고, 坤의 이치에서 女子가 되며, 두 氣가 서로 영향을 받아 반응하여 萬物을 낳게 된다. 萬物은 낳고 낳아서 이러한 變化는 끝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남을 얻어서 가장 神靈스럽고, 奇妙하다. 이미 모양이 생기니 神이 意識을 갖게 되고, 五性이 반응하여 움직이니, 善과 惡이 갈리면서 많은 일이 생겨난다.
聖人은 이것을 치우치지 않고, 바르고, 어질고, 의로움으로 정하고,(聖人의 道는 仁, 義, 中, 正 일 따름이다) 정하되 마음의 고요함을 으뜸으로 하여,(無欲함으로 精하다) 사람의 지극한 原理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聖人은 하늘과 땅은 그 德이 합하고, 해와 달은 그 밝음을 합하며, 사계절은 그 順序가 합하고, 鬼神은 그 吉 하고 凶 함을 합한다.
君子는 이것(中正仁義主靜)을 닦으니 吉하고, 小人은 이것(中正仁義主靜)을 어김으로 凶하다. 그러므로 가로되「하늘을 세우는 이치를 陰과 陽이라 하고, 땅을 세우는 이치를 부드러움과 강함이라 하고, 사람의 도리를 세우는 이치를 仁과 義라 한다」고 하며, 또「시작과 끝의 이치를 생각해 보면 죽음과 삶을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니 偉大하다. 易이여! 이것이 그 至極한 원리이다!
第 二 西 銘 圖
乾을 아버지라 부르고, 坤을 어머니라 부른다. 나는 아주 작은 존재로서 우주의 가운데에 섞여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天地를 채운 것은 나의 形體요, 天地를 이끄는 것은 나의 本性이다. 백성은 나의 同胞요, 만물은 나와 같은 族屬이다. 天子란 나의 父母의 맏아들이요, 大臣이란 것은 맏아들의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이다. 나이 많은 사람을 尊敬하는 것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까닭이요, 외롭고 약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는 까닭이다. 聖人은 天地와 德을 合한 사람이요, 賢人은 天地에서 빼어난 사람이다. 무릇 天下의 늙고, 병들고, 외로운 홀아비와 과부들은 모두 내 兄弟 중에서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고, 呼訴 할 데 없는 자이다.
때때로 保存함은 자식의 공경이요. 즐거워 근심 아니함은 孝에 순수한 者이다. 天命을 어김은 德을 어지럽히는 것이라 하고, 仁을 해치면 賊이라 이른다. 惡을 만드는 者는 不才요, 그 天性을 따라 行動함은 오직 그 어버이를 닮은 者이다, 天地의 造化를 알면 그 일을 잘 하게 되고, 신묘함을 알면 그 뜻을 잘 이어 받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父母를 辱되게 아니 함이요, 깨끗한 마음을 保存하고 착한 성품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김에 게을리 아니 함이다. 맛난 술을 싫어함은 禹 임금이 어버이를 돌보기 위함이고, 英才를 기르는 것은 潁考叔 같은 사람으로 그러한 部類를 길이 이어가게 함이다, 괴로워도 부모에게 공경을 게을리 아니하여 마침내 어버이를 기쁘게 하니, 이는 舜 임금의 孝道의 功績이요, 도망칠 곳이 없어도 죽음을 避하지 않음은 申生의 恭敬이다.
父母가 주신 몸을 받아 온전하게 돌아감은 曾參이며, 父母의 말씀을 따라 용감하여 命令에 順從함은 伯寄이다. 富貴와 福利와 惠澤은 장차 나의 삶을 두터이 할 것이요, 가난하고 신분이 낮으며, 근심과 걱정은 이것으로 하여금 사람을 완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나는 하늘의 뜻을 順從하고, 죽을 때는 나는 편안히 돌아 가리라.
第 三 小 學 圖
元, 亨, 利, 貞은 日常的인 하늘의 法道요. 仁, 義, 禮, 智는 사람의 性品의 根本이다.
이것들은 처음부터 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몹시 잘 가꾸어진 四端이 느낌에 따라 나타나서, 어버이를 사랑하고, 兄을 恭敬하고, 임금께 충성하고, 어른께 공손하니, 이를 일러「秉彛(本性)」라 하고, 本性에는 순하고 강함은 없다. 오직 聖人의 本性은 하늘과 같이 넓고 넓어서, 털끝만한 힘을 들이지 않아도 온갖 착함이 가득하다.
뭇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物慾으로 가려져 그 근본을 무너뜨리고 自暴自棄를 쉽게 한다. 聖人은 이를 惻隱하게 생각하여 學校를 세우고, 스승을 받들어 그 뿌리를 북돋우고, 그 가지를 펴게 하였다.
小學의 方法이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과,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恭遜하여, 행동을 道理에 어긋남이 없게 함이다. 이렇게 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시를 외우고 책도 읽으며, 노래하고 춤을 추더라도 생각이 分에 넘침이 없게 해야 한다. 理致를 探究하고 몸을 갈고 닦는 것이 이 學問의 큰 목적이다.
밝은 命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니 안과 밖이 없고, 德行을 높이고, 業積을 넓혀야 그 처음으로 돌아간다. 옛적에도 不足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제는 어찌 남음이 있으랴? 世代가 멀어지고 聖人이 안계시니 經典이 잃어지고, 가르침이 解弛해 지니, 어릴 때의 가르침이 端正치 못하면, 커서는 더욱 천박하고 경솔해진다. 마을에는 善한 풍속이 없어지고, 世代마다 善良한 人材가 不足하다. 利益을 탐하는 欲心에 옥신각신 싸움하며, 異端의 말로 시끄럽게 떠들기를 잘 한다.
다행히 이 本性이 하늘이 다하도록 떨어지지 않으니, 이에 옛사람의 말씀을 잘 듣고 모아서, 뒤에 오는 世代를 깨우칠까 하노라. 어여쁘구나 젊은 사람들이여! 이 冊을 잘 받들어 읽으라, 이것은 나의 老妄한 말이 아니라, 聖人의 말씀이다.
第 四 大 學 圖
大學의 道理는 明德을 밝힘에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고, 가장 착한 것에 머무르도록 하는데 있다.
머무를 곳을 알고 난 다음에야 할 일을 決定하게 되고, 할 일을 決定한 다음에야 마음이 安靜이 되고, 마음이 安靜된 다음에야 모든 것이 便安할 수 있고, 모든 것이 便安한 다음에야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고, 깊이 생각한 다음에야 가장 착한 것에 머무를 수 있는 能力을 얻을 수 있다.
온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에는 그 물건의 根本과 結末이 있고, 모든 일에는 그 끝과 시작이 있다. 먼저 하야야 할 일을 알고 나중에 하여야 할 일을 알면, 道理를 깨우쳐 道에 가까워 진다.
옛적에 明德을 天下에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의 나라를 잘 다스리고, 그의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의 집안을 잘 다스렸고, 그의 집안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잘 修養하고, 그 몸을 잘 修養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뜻을 眞實로 거짓됨이 없도록 하고, 그 뜻을 眞實로 거짓됨이 없도록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知識을 最高가 되도록 하고, 그 知識을 最高가 되도록 하는 것은 事物의 理致를 아는데 있다.
事物의 理致를 알고 난 다음에 그 知識이 最高가 되도록 하고, 그 知識이 最高가 되도록 하고 난 다음에 그 뜻이 眞實로 거짓됨이 없도록 하고, 그 뜻이 眞實로 거짓됨이 없도록 하고 난 다음에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이 바르게 된 다음에 그 몸을 잘 修養하고, 그 몸이 잘 修養하고 난 다음에 그의 집안을 잘 다스리고, 그의 집안이 잘 다스려 지고 난 다음에 그의 나라를 다스리고, 그의 나라가 잘 다스려진 다음에 天下가 太平해 진다.
天子로부터 庶人에 이르기 까지 한결같이 모두가 그 몸을 잘 修養하는 것을 根本으로 삼는다. 根本이 잘 닦여지지 않고는 그 끝을 잘 다스릴 수 없다. 그러한 것을 열심히 하였는데 소홀해질 수 없고, 소홀히 하고 좋은 결과를 이룰 수는 없다.
第 五 白 綠 洞 規 圖
나는 옛 聖賢이 學問에 뜻을 갖도록 사람을 가르치는 까닭을 보니, 그것은 사람이 지켜야 할 道理를 硏究하고, 그 뜻을 밝혀서, 자신의 몸을 修養한 다음에 사람들에게 까지 그 影響을 미치려 했음을 알았다.
한갓 글을 많이 읽고, 그것을 記憶하기에 힘써서 時歌와 文章으로 이름이나 날리고, 자신의 利益이나 取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學問하는 사람은 이미 이와는 반대로 되었다.
그러나 聖賢들이 사람을 가르치던 方法은 經典에 다 갖추어져 있다. 뜻이 있는 선비는 마땅히 경전을 열심히 읽고, 깊이 생각하여, 묻고 答辯하여야 할 것이다.
진실로 理致의 當然함을 알고, 그 자신을 꾸짖어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하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法道와 禁止하여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갖추는 것을 어찌 남이 만들어 주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요즈음에도 學校에는 規約이 있는데, 學問하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하는데 있어서, 이미 학문이나 생각이 부족하고, 반드시 그 方法이 모두 옛사람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이 學堂에서는 그것을 實施하지 않고, 특히 聖賢이 사람을 가르쳐 學問을 하게한, 그 큰 根據를 取하여 오른쪽과 같이 조목조목 列擧하여 문 위의 懸板에 揭示한다.
諸君은 서로서로 論議하고, 說明하며, 그것을 遵守하여 몸으로 實踐하면, 생각하고 말하는 데 있어서 삼가 하고 두려워 하는 바가 반드시 저 規約보다도 더 嚴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間或 禁止하여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의 범위를 벗어남이 있다면 規約이란 것은 반드시 받아 들여야 하고, 省略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諸君들은 잘 생각하여 명심 하여야 한다.
第 六 心 統 性 情 圖
林隱 程씨는『이른바 心이 性과 情을 統率한다는 것은, 사람은 五行의 빼어남을 받아서 태어나고, 그 빼어난 것에서 五性이 갖추어지고, 五性이 움직여서 七情이 나온다고 하였다.
무릇 그 性과 情을 함께 모으는 것은 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아니하여 性이 되니 心의 體요, 그 마음이 대상과 접하게 되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어 情이 되니 心의 用이다. 張子는「마음은 性과 情을 統率한다」하였으니 이 말이 適當하다고 하였다. 마음은 性을 統率함으로 仁義禮智를 性이라 하고, 또「仁義之心」이란 말도 있게 되는 것이며, 마음은 情을 統率함으로 惻隱, 羞惡, 辭讓, 是非를 情이라 하고 또「惻隱之心」이니「羞惡, 辭讓, 是非之心」이니 하는 말도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性을 統率하지 못하면 피어나지 못하여, 中을 이룰 수 없어서 性이 구멍 뚫리기 쉽고, 마음이 情을 統率하지 못하면, 調和를 節制하게 되어 情이 放蕩하기 쉽다.
배우는 사람은 이러한 것을 알고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性을 기르고 그 情을 制約하면 學問하는 길을 찾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臣이 생각 해보니 程子의 好學論에는 그 情을 制約한다는 말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性을 기른다는 말 앞에 있는데, 이 글에는 도리어 뒤에 있으니 이것은 心이 性과 情을 統率하는 것으로써 말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이치를 따라 말하면 마땅히 程子의 論理가 그 順理에 맞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림에 穩當치 못한 곳이 있어서 약간 고쳤습니다.
第 七 仁 說 圖
朱子가 말씀 하시기를 仁이란 天地가 萬物을 낳게 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그것을 얻어서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發生하기 전에는 四德이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仁만은 네 가지를 모두 包括한다.
그러므로, 仁을 길러내고, 育成하여, 缺點이 없도록 하여, 하나로 通達하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이른바 生의 性이니, 愛의 理니, 仁의 體니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미 나타났을 때에는 四端이 드러나지만, 오직 惻隱만은 四端에 모두 通하고 있다.
그러므로 넓게 되어 사물을 속속들이 꿰뚫어 通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른바 性의 情이니, 愛의 發이니, 仁의 用이니 하는 것이 이것이다.
全般的으로 말하면 아직 發生하지 않음은 本體요, 이미 發生함은 作用이다. 部分的으로 말하면, 仁은 體요, 惻隱은 用이다. 公平하다는 것은, 仁을 體驗하는 까닭이니「自己를 克復하여, 禮를 回復하면 仁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개 公平하면 仁하고, 仁하면 사랑한다. 孝道하고 恭敬하는 것이 그 作用이 되고, 용서하는 것은 베푸는 것이고, 知覺하는 것은 아는 일이다.
또 말씀 하시길 天地의 마음은 그 德이 네 가지 있으니 元, 亨, 利, 貞이라 한다.
元은 이것들에 通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그것이 運行이 되어 春, 夏, 秋, 冬의 順序로 되는데, 여기서도 봄의 살아 움직이는 氣가 通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도 그 德이 네 가지 있으니 仁, 義, 禮, 智라 한다. 그러나 그 發用에는 仁이 包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이 發生하여 愛, 恭, 宜, 別의 情이 되는데, 여기서도 惻隱의 마음이 이것들에 通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대개 仁의 道는 天地의 萬物을 낳는 마음이 萬物에 있어서, 情이 發生하기 前에 本體가 이미 갖추어 있고, 情이 이미 發生하면 그 作用이 끝이 없다. 진실로 이것을 體驗하여 保存하면 많은 善의 根源과 백가지 행위의 根本이 다 여기에 있지 아니함이 없다.
이것이 孔子 門下의 가르침이 반드시 學者로 하여금 仁을 求함에 汲汲하게 하는 까닭이다.
그 말에「克己復禮爲仁」이라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자기의 개인의 慾心을 克復하여 除去하고 天理에 돌아가면 이 마음의 本體가 거기에 있지 않음이 없고, 이 마음의 作用이 行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第 八 心 學 圖
林隱 程氏는「赤子心」은 사람의 욕심이 아직 다스려지지 않은 良心이요, 사람의 마음은 慾心을 깨우친 것이요, 大人의 마음은 義理가 잘 갖추어진 本心이요, 道心은 義理를 깨우친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事實은 形氣에서 생겼기 때문에 人心이 없을 수 없고, 性과 命에 根源하면 道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精一」과「擇執」으로부터 그 이하는 인간의 慾心을 막고 天理를 保存하는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愼獨」以下는 인간의 慾心을 막는 工夫이니 반드시 不動心에 까지 이르러야 富貴가 어지럽히지 못하고, 가난하고 천한 것이 옮기지 못하고, 威脅과 武力이 屈服 시키지 못하게 되어 그 道가 밝아지고 德이 確立됨을 알 수 있게 된다.
「戒懼」이하는 天理를 保存하는 工夫이니 반드시「從心」에 까지 이르러야 마음이 곧 本體요, 慾心이 곧 作用이며, 本體가 곧 道요, 作用이 곧 義로운 것이며, 소리가 법이 되고 몸이 법도가 있게 되어 생각하지 않고도 얻고, 힘쓰지 않아도 들어 맞게 됨을 알 수 있게 된다.
요컨대 공부하는 要領은 하나의「敬」을 떠나지 못한다. 대개 마음이란 하나의 몸을 主宰하는 것이요, 敬은 또 한 마음의 主宰인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主一無適」의 說과 「整齊嚴肅」의 說과「其心收斂, 常惺惺」의 說에 대하여 익숙히 探究해 보면 그 工夫가 절로 다 되어 聖人의 경지에 들어감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第 九 敬 齊 箴 圖
그 衣冠을 바로하고, 쳐다보는 눈빛으로 존경하라.
마음을 가라앉혀 居處하듯이 하고, 上帝를 대해 모시듯 하라.
발 걸음은 무겁게 하고, 손짓은 공손하게 하라.
땅을 골라 밟되 개미 뚝에서 구비를 돌 듯하라.
門을 나가면 손님같이 하고, 일을 받들면 祭祀를 모시듯 하여 조심조심 두려워하여 감히 잠시도 安易하게 말라.
입을 지키기 병마개 막 듯하고, 뜻을 지키기를 城門 지키듯 하여, 성실하고 진실하여 敢히 잠시도 경솔하게 하지 말라.
東으로써 西로 가지 말며, 南으로써 北으로 가지말고, 일에 當하여 마음을 保存하고 다른 데론 가지 말라.
하나에 둘을 겹치지 말고, 둘에 셋을 겹치지 말라.
마음은 오직 하나에 專念하여 만 가지의 變化를 살필 수 있다.
이에 일 삼으면 이것이 敬을 지킴이니, 움직임이나 머물러 조용히 있을 때나 어기지 말고 밖이나 안이나 서로 바르게 하라.
잠시라도 틈이 나면 만 가지의 慾心이 불길이 없이도 뜨거워지고 얼음이 없이도 차가워 지니라.
털끝만큼이라도 틀림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뒤 바뀌고, 三綱이 무너지고 九法이 퇴폐한다.
오오! 小子여! 생각하고 조심하라!
먹으로 글로 써서 경계를 삼아 감히 靈臺에 告하노라.
第 十 夙 興 夜 寐 箴 圖
닭이 울어 깨어나면 생각이 차츰 달리기 시작한다. 어찌 그 사이에서 조용하게 整理하고 가꾸지 않아서 되겠는가?
혹은 지난 허물을 反省하고 혹은 새로 얻은 것을 뽑아내어, 차례로 條理를 세워 묵묵히 똑똑하고 분명하게 알지어다.
근본이 서있으면 이른 새벽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衣冠을 차리고 단정히 앉아 몸을 거둔다. 이 마음 거둬 잡으니 환하기가 해가 뜬 것과 같다.
태도를 엄숙하고, 단정하게 하여 마음을 비워 밝게 하고, 靜肅하기를 한결 같이하라. 이에 책을 펴고 공부하는데 聖賢을 대하여 모시듯 하라. 夫子께서 자리에 계시고, 顔子와 曾子가 앞뒤로 서있다.
聖人이나 위대한 스승의 말씀을 몸소 懇切하게 敬聽하고, 弟子들의 묻고, 답하는 말을 반복해서 參考하여 바로 잡으라.
일이 생기면 이에 對應하고 行爲를 통하여 그 徵兆를 經驗하라. 환하게 밝은 하나님의 命에 항상 눈을 두어야 한다. 事物應接이 끝나면 나는 도로 이전과 같이 되돌아 간다.
마음을 맑게 하고 정신을 모아 생각을 쉬게 한다.
움직임과 고요함은 돌고 돌아 마음만이 이를 살핀다. 고요할 때엔 마음을 保存하고, 움직일 때엔 마음을 살피어 둘, 셋으로 오가지 말라.
글을 읽고 남은 틈에 간간이 그러한 境地에서 즐기고, 精神을 놓아 펴서 性情을 쉬게 하고 키우라.
저녁에 해가 저물면 사람이 피로하게 되어 昏迷한 기운이 틈타기 쉬우니, 몸과 마음을 단정히 가다듬어 정신을 밝게 하여 떨치라. 밤이 깊어 잠에 들되 손과 발을 가지런히 하라.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心神을 잠으로 돌아가게 하라. 夜氣로써 키우면 다시 蘇生하게 된다.
생각은 언제나 여기 있고 낮이나 밤이나 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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