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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음란한 진성여왕?

음란한 진성여왕?

입력 : 2009.12.12 03:05 / 수정 : 2009.12.12 19:39

'착한 얼굴과 몸매'를 지닌 미소년에 사족을 못 쓴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다음 기록에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왕은 몰래 2~3명의 소년 미장부(美丈夫)를 불러들여 음란(淫亂)하더니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겼다."

누구의 이야기일까? 신라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이다. 신라 세 명의 여왕 중 통일의 기틀을 닦았다고 알려진 선덕·진덕여왕과는 달리 진성여왕은 망국(亡國)을 불러온 '팜므 파탈'처럼 여겨진다. '음란'과 '실정(失政)'으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얘기다.

'삼국유사'는 진성여왕에게 배필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즉위 초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각간 벼슬의 위홍(魏弘)이었다. 도굴당했던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를 1966년에 되찾으면서 놀라운 비밀이 알려지게 됐다.

"위홍은 경문왕의 동생이었다!" 경문왕은 진성여왕의 아버지였으니 친삼촌이 정부(情夫)였던 것이 된다. 이 '삼촌'은 또한 여왕의 유모의 남편이기도 했다. 20세기에 '음란함' 한 건이 추가된 셈이다.

■친삼촌이 情夫… 당시 왕실선 근친혼 흔해

과연 그랬을까? 당시 신라 왕족과 귀족 사이에서 근친혼(近親婚)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는 고모와 결혼했다. 김유신은 김춘추의 처남인 동시에 사위였다. 이렇듯 도무지 촌수를 따지기 어렵게 되는 상황은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인사상의 불합리성을 별도로 놓고 보면, '미소년과 사통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남성 군주가 두세 명의 '미소녀 후궁'을 데리고 있었다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빠 정강왕이 죽기 직전 "내 누이는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골상(骨相)이 남자와 같다"고 했던 것을 보면 여왕의 미모가 뛰어났던 것 같지는 않지만, 역시 예사 인물은 아니었다. 즉위하자마자 사면령을 내리고 여러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하는 등 나름대로 선정(善政)을 위해 노력한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재위 3년째인 889년부터 파국이 시작됐다. 국고가 텅 비게 돼 지방에 세금을 독촉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전국적인 농민반란을 불러왔다. 891년에는 궁예(弓裔)가 이끄는 군대가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휩쓸었고 892년에는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웠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가 여왕의 재위 중에 끝나 버렸던 것이다. 다급해진 여왕은 894년 천재 유학파 최치원(崔致遠)이 올린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통해 개혁을 시도했다. 그 내용은 중앙집권의 강화와 골품을 초월한 인재 등용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귀족의 반대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를 자세히 보면 당시의 상황은 참담했다. 반란군이 도처에 들끓는 상황에서도 화랑들은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였다. 걸식하던 일반 농민들이 부잣집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일어났다.

어느 마을에 '효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집 한 채와 경비병력을 주고 '효양(孝養)마을'이라고 적은 문을 세워서 백성에게 홍보해야 할 정도로 나라 전체의 질서와 규범이 문란해진 상태였다(효녀 지은의 이야기).

■여성 아니었어도 모멸찬 평가 받았을까?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던 것일까? 학자들은 신라 쇠망의 원인에 대해 몇 가지를 꼽는다. 귀족과 사찰의 대토지 경영, 소농의 몰락, 장기간의 평화로 인한 국민정신의 타락, 지역적 폐쇄성 등이다. 신라 하대(下代)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오로지 여왕에게만 돌린다는 것은 부당하다.

여왕의 치적으로 꼽히는 것이 위홍 등에게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도록 한 일이다.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업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당대의 유행가였던 향가 시구 중 불확실한 부분이 생겨났고 연회장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사람마다 부르는 가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일종의 '노래방 가사집'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재위 11년째인 897년 6월 여왕은 자신의 부덕(不德)을 한탄하며 조카 요(嶢·효공왕)에게 양위했고 6개월 뒤 북궁(北宮)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 여왕을 '폭군'이나 '성군'처럼 한마디 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난세에 권좌에 올라 상황을 타개하려 애썼으나 끝내 실패했던 불행한 군주였다. 역사에서 그런 왕은 너무나 많았다. 만약 여성이 아니었더라면 '음란'과 '실정'을 꾸짖은 사관(史官)의 모멸찬 붓끝이 그 앞에서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 뒤로 1000년이 넘도록 한국사에서 두 번 다시 여왕은 나오지 않았다.

  • [다시읽는 여인열전] ‘음녀로 몰린 성군’ 진성여왕
  • “국정혼란은 내탓”…왕위 넘겨 책임정치 실현
    여왕 간통설 근거없어…즉위하자 조세 면제
  • 입력 : 2002.07.09 17:47
    • 신라가 진성여왕(재위 887~897) 때문에 망했다는 통설은 과연 맞는 것일까. 진성여왕은 신라의 51대왕으로 56대 경순왕까지 다섯 명의 후대 임금들이 더 있다. 그럼에도 신라는 진성여왕 때문에 망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런 시각의 원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진성왕 조(條)이다.

      “진성왕이 전부터 각간 위홍(魏弘)과 통하였는데〔通〕,때에 이르러 항상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란 시호를 추증했다. 이때부터 2~3명의 미소년을 가만히 불러들여 음란한 짓을 자행하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위임하니 이로 말미암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게 날뛰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정치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졌다….”

      일연의 ‘삼국유사’도 이런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제5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 등 3,4 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해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근래에 발견된 황룡사 탑지에서 황룡사 9층목탑의 중수책임자였던 위홍이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의 동생이라는 내용이 나오자 그녀는 ‘역시’ 음녀였다며 그녀 때문에 신라가 망했다는 시각이 맞음을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는 신라 당대인들의 시각에서는 불륜이나 추행이 아니었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란 시호를 추증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이나 ‘삼국유사’ 「왕력(王曆)」조의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大角干)이다”라는 기록은 둘 사이가 공인된 관계였음을 말해준다. 둘이 신라 사회의 성 윤리를 어기고 간통한 사이였다면 죽은 위홍을 ‘대왕’으로 추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오빠 정강왕의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도 음녀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불행히 사자(嗣子)가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진성여왕)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상(骨相)이 장부와 같으니 경 등은 선덕·진덕여왕의 고사에 의거해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강왕이 진성여왕을 후사로 삼은 것은 위기타개를 위한 일종의 승부수였다. 선덕·진덕여왕이 위기의 신라를 구해내고 신라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것과 같은 역할을 진성여왕에게서 기대했던 것이다. 진성여왕 즉위 당시 신라는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진골 귀족 사이에 반란이 잇달았다. 진성여왕 때부터 역순으로 잠시 살펴보면 50대 정강왕 2년(887)에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49대 헌강왕 5년(879)에 일길찬 신홍(信弘)이, 48대 경문왕 14년(874)에 이찬 근종(近宗), 6년(866)에 이찬 윤흥(允興)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불과 20년 사이에 4번의 반란이 일어났으니 연례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강왕은 여왕을 세워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었다.

      진성여왕은 정강왕의 믿음에 보답하듯 즉위하자마자 죄수를 대사(大赦)하고 모든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했다. 그녀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는 애민군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에게는 자신의 구상을 집행할 인재들이 없었다. 선덕·진덕을 보필했던 김춘추와 김유신같은 인재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재위 3년(889) 상주 지방에서 원종과 애노가 주도하는 난이 일어나자 진성여왕이 진압하라고 보낸 내마(柰麻) 영기(令奇)가 성을 장악한 반군이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 반란의 계기가 ‘국내 여러 주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결핍되어 국왕이 사신을 파견해 납세를 독촉한 것’ 때문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이 무렵 신라의 국가시스템이 붕괴했음을 말해준다.

      위홍은 그녀의 일급 참모였지만 이런 위기상황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황룡사 9층목탑을 중수하고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문화의 인물이지 위기관리 인물은 아니었고 또 일찍 사망했다. ‘삼대목’ 편찬 등은 진성여왕과 위홍의 신라전통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당시 신라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비상수단을 통한 안정이었다.

      재위 5년 양길(梁吉)의 부장 궁예(弓裔)가 강릉지역을 공격하고, 재위 6년에는 견훤(甄萱:진훤)이 완산(完山: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우는 등 혼란이 가중됐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그녀가 던진 승부수가 최치원이었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당나라에 문명을 떨친 최치원은 헌강왕 11년(885년) 17년간의 체당(滯唐)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는 세계제국 당나라에서 익힌 정치철학과 행정능력을 신라에서 발휘하고 싶었으나 진골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폐쇄적인 신라에서 중하위 지방관을 전전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그런 최치원에게 진성여왕은 재위 8년(894) 난국타개책을 작성해 올리라고 명령했다. 최치원은 이에 따라 시무 11조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이를 즉시 가납하고 최치원을 6두품 중의 최고 관직인 제6관위 아찬에 봉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최치원」 조에서 “최치원은 중국 유학에서 배운 것이 많다고 생각해서 본국에 돌아와 자신의 뜻을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말세에 그를 의심하고 꺼리는 자가 많아서 그의 뜻이 허용되지 못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그의 시무책은 진골귀족들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이는 신라 개혁안의 좌절을 의미했다. 그 결과 재위 10년에는 빨간 바지를 입은 도적인 적고적(赤袴賊)이 지방은 물론 서라벌의 모량리까지 약탈하는 등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진성여왕은 이런 사태에 책임지고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재위 11년(897) 6월 “근년 이래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나의 부덕(不德) 때문이다”라며 큰오빠 헌강왕의 서자(효공왕)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36대 혜공왕 이래 국왕이 피살되거나 자결하는 등 신라 하대의 혼란은 오래되었어도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양위한 임금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왕위를 내놓고 북궁(北宮)에서 거주하다가 6개월도 안된 그해 12월 세상을 떠난 데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책임정치 실현은 후대에 신라 망국의 책임에 대한 자인(自認)으로 악용됐다.

      그러나 진성여왕 당대에 세워진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에서 최치원은 “(진성여왕의)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고 적어 그녀를 성군으로 묘사했다. 당대의 성군과 후대의 음녀 중 여성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면 진실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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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최치원이 진성여왕 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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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 충남 보령시 성주면(聖住面)에 있는 통일신라 말의 고승

      무염(無染·801~888)의 탑비로서 신라 것 중 가장 큰 비석이다(높이

      4.55m).국보 8호로 지정됐다. 낭혜는 진성여왕이 내린 시호이고 원법명은

      무염인데 태종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 태어났다.

      당(唐)나라에 20여 년 체류했으며 귀국 후 성주사에 있다가 진성여왕 2년

      입적(入寂)했다.

      이 탑비는 거대한 외형이나 힘찬 조각과 글씨들이 신라 석비의 대표라고

      할만하다. 최치원같은 비판적 지식인이 진성여왕을 극찬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특히 이 글은 진성여왕에 의해 최치원이 중용되기 이전에

      쓴 글로, 후대 기록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가 그녀를 극도로

      폄하한 데 대한 당대의 반론이란 점에서 신뢰도가 높다.

      (이덕일·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