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10.24 11:16 / 수정 : 2007.10.24 15:54
- ▲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이 죽은 왕자를 기리며 정유년(서기 577년) 2월에 왕흥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담긴 사리함(사리를 담은 함) /문화재청 제공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이 죽은 왕자를 기리며 정유년(서기 577년) 2월에 왕흥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담긴 사리함(사리를 담은 함)이 발굴됐다. 백제의 왕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발굴된 것은 무령왕릉(1971년)과 역시 위덕왕의 생전 이름(=昌 창)을 새긴 사리감(1994년)에 이어 세 번째다. 그간 부여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따라 서기 600년(백제 법왕 2년)에 일부 건설된 뒤 서기 634년(무왕 35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번 발굴로 577년에 축조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부여 왕흥사터 목탑터에서 발굴된 사리함과 사리장치 등을 공개했다.
위덕왕의 생전 이름인 창(昌)의 이름이 적힌 사리함(높이10.3㎝)은 목탑의 기둥을 세우는 장치인 심초석(크기 100×110㎝) 남쪽 끝 부분에 16×12×16㎝의 크기로 마련된 사리공(사리함을 담기 위해 마련한 공간) 내부에 봉안돼 있었다. 사리공은 화강암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사리함은 원통 모양의 청동 사리외함에 은으로 만든 사리병,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금으로 된 사리병 등 3중’으로 구성돼 있었다. 청동사리외함은 꽃봉오리 모양의 볼록한 뚜껑으로 덮었다. 사리는 그러나 발굴되지 않았다.
명문은 사리함 몸체에 다섯자를 기준으로 여섯행 새겼다. 내용은 ‘丁酉年二月(정유년 이월)/十五日百濟(십오일 백제)/王昌爲亡王(왕창 위망왕)/子 立刹本舍(자 립찰 본사)/利二枚葬時(리이매장시)/神化爲三(위화위삼)’이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웠다. 원래 사리 두 매를 묻었는데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는 내용이다.
- ▲ 사리함 몸체에 새겨진 명문 기록 /문화재청 제공
부여문화재연구소측은 이 기록을 통해 그 동안 삼국사기의 기록에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고 있었던 부여 왕흥사의 실제 축조 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44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태자 이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소측은 “명문과 사리구의 구성 내용을 통해서 절의 축조가 역시 위덕왕 대에 만들어진 능산리사지(서기 567년) 보다 10년 뒤에 조성됐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백제사 시대 구분과 당시 고고학적 자료 연구에서 중요한 전기가 마련됐다”며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생전 이름이 창이었던 위덕왕은 왕자 시절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적장과 1대 1로 맞붙어 적장의 목을 벤 것으로 일본 최고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도 기록돼 있다. 그러나 아버지인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중이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신하들이 말리면서 왕위를 잇게 됐다.
이번 발굴에서 출토된, 건축물을 세울 때 액을 없애기 위해 땅에 묻는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을 중심으로 다량 출토됐다.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을 비롯하여 중국 남북조시대의 북제(550~577년)에서 사용했던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이 나왔다. 연구소측은 백제시대 장신구 연구와 귀금속 제작, 대외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 ▲ 왕흥사터에서 출토된 각종 진단구 /문화재청 제공
백제는 성왕 때부터 중국에서 사리신앙의 영향을 받아 위덕왕대에는 일본에 사리와 함께 승려와 장인(匠人)을 파견하는 등 불교 문화의 일본 전파에 주된 역할을 했는데 이번 사리구와 진단구는 이러한 백제 불교 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연구소측은 이번 발굴의 중요한 성과를 종합하면 첫째, 최초로 백제시대 목탑터에서 사리장치가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확인됐다는 것과 함께 둘째,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577년)과 관련된 명문 기록이 나왔다는 점, 셋째 사리기를 모신 예술적 수법이나 목탑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이 확인됐고 마지막으로?사리구를 포함한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 다량의 진단구가 출토되어 당시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확인했다는 점을 들었다.
황금 사리병을 담은 청동 사리함의 몸체에는 '정유년이월십오일백제왕창(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이라는 명문이 새겨졌다. 백제 창왕 재위기간 중 정유년은 577년이다.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창왕 13년(567년)' 명문이 새겨진 석제 사리외감(舍利外龕. 옆으로 집어넣는 방식의 사리안치용 상자)이 발견된 적은 있으나 사리외감 속의 사리병은 도굴된 뒤였다. 즉,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황금 사리병은 현재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사리병 가운데 최고(最古)의 것인 동시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백제 사리병이 출현했음을 뜻한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의 발굴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발굴 당시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봉안됐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청동사리함은 목탑의 기둥을 세우는 장치인 심초석 하단에 마련된 사리안치용 석제의 한쪽 끝에 뚫린 사리공에 봉안돼 있었다. 청동사리함(높이 10.3㎝, 폭7.9㎝)은 발굴 당시 꽃봉오리 모양의 뚜껑꼭지가 떨어져 내부에 흙탕물이 차 있는 상태였다. 사리함 몸체에는 다음과 같이 5자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졌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고 해석된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이외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가 능산리사(567년 축조)보다 10년 늦게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짐에 따라 6세기 중반 백제 사찰 축조양식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은제사리외병은 높이 6.8㎝, 지름 4.4㎝의 크기로 뚜껑에 연화문이 장식돼 있다. 내부에 황금사리내병을 안치하기 위한 받침대가 마련돼 있으며 청동사리함과는 달리 맑은 물이 차 있었다. 금제사리내병은 높이 4.6㎝, 지름 1.5㎝로 원형을 완벽하게 유지한 채 발견됐다. 그러나 청동사리함의 몸체에 적힌 기록과는 달리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번 황금 사리병의 발굴에 대해 백제사 전공자 등 학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은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발견 이래 백제의 고도에서 발굴한 최대의 성과"라고 했으며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하루 빨리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고 교과서 수록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백제 사리장치 발견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금, 은, 동의 형태로 중첩된 완전한 사리장치가 발견됐다는 점,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독특한 사리장치의 안치방식, 사리봉안 기록이 함께 발견된 점 등에서 이번 발견은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과장은 특히 "심초석 밑에 또 하나의 석제를 깔고 사리함을 안치하는 방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백제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소화한 형태"라고 강조했다. 중국에서는 심초석 밑에 전실 등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사리장치를 안치했다. 왕흥사 목탑은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는 대신 심초석 밑에 또 하나의 석제를 깔아 사리장치를 안치하면서도 심초석이 받는 하중을 나누어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또 청동 사리함 몸체에 새겨진 '사리이매장시 신화위삼(舍利李枚葬時 神化爲三. 사리 두 매를 묻었으나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이라는 글귀는 사리를 안치할 때 신묘한 이야기를 적는 전형적인 사리안치 기록의 형태를 보여준다.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장은 사리병의 형태를 통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어깨가 과장되고 구연부(아가리 부위)가 예리한 은제 사리외병의 형태는 전형적인 중국 남북조시대 도자기의 모습이라는 것. 또 "청동외함에 새겨진 명문은 무령왕릉의 글씨체와 비슷하며 당시 예서체의 흔적으로 보인다"며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사리장치 주위에 지진 등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는 8천 여 개의 구슬을 비롯해 목걸이,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픔, 관모장식을 비롯해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에서 사용한 상평오수전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계명대 노중국 교수는 상평오수전과 관련해 "백제는 창왕의 선왕인 성왕 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남조와 주로 교류를 가졌으나 창왕 대에 이르러 북조의 여러 나라와도 교류를 확대했다"며 "북조의 오수전은 백제의 외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왕흥사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됐다. 현재 확인된 규모는 남북길이 62m, 동서너비 13m로 사찰의 석축과 연결된 20m 가량은 경사졌으며 그 아래쪽부터는 평탄하게 조성됐다. 이 어도는 '35년(634년) 봄 2월 왕흥사가 준공됐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는 삼국사기 백제 무왕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왕이 백마강을 따라 왕흥사에 도착한 뒤 배를 대고 경내로 진입하는 도로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동서방향의 석축부위에서 백제시대 평기와가 다량 출토됐다. 연화문수막새(蓮華紋圓瓦堂), 연목와(椽木瓦) 등이 다수 출토됐으며 소조 광배(光背)로 보이는 토제품 2점도 함께 발견됐다. (부여=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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