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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지정번호
:
국보 제151호
지정연월일
:
1973년 12월 31일
시 대
:
조선시대
종 별
:
활자본
수 량
:
2,077책
크 기
:
정족산본 55×30㎝, 태백산본 43×32㎝
재 료
:
저지
소 유 자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 재 지
:

서울 신림동 산56-1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조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기까지 약 470여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총 1,893권 888책으로 편찬·기록한 편년체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한 것은 태조가 태종 8년(1408)에 죽자, 이듬해 8월에 태종이 하륜(河崙)에게 ≪태조실록(太祖實錄)≫의 편찬을 명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어 ≪정종실록(定宗實錄)≫과 ≪태종실록(太宗實錄)≫은 세종 5년(1423) 11월부터 편찬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의 태조·정종·태종의 3대 실록은 처음 각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春秋館), 1부는 고려시대부터 실록을 보관했던 충주사고(忠州史庫)에 간직했다.

세종 27년(1445)에 다시 2부를 등사하여 전주(全州)와 성주(星州)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하여 1부씩 분장하였다.

≪세종실록≫ 이후는 각 왕의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활자로 인쇄하여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네 사고에 보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 충주 성주사고가 불에 타서 소실되고 전주사고본만이 남게 되었다.

이 전주사고본(태조∼명종까지의 13대 실록)은 전주유생인 안의(安義)·손홍록(孫弘錄) 등이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 병화를 면한 것이며, 그것을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7월에 정부가 인계 받아 해주(海州)로 운반했다가, 선조 29년(1596)에 강화도(江華島), 다시 선조 32년(1599)에 묘향산(妙香山)으로 이장하면서 보관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 36년(1603) 7월부터 선조 38년(1606) 3월까지 13대 실록을 다시 3부씩 출판하고, 최종 교정본과 병화를 면한 전주사고의 원본 실록을 합쳐 5부를 만들었다.

이들 실록은 다시 춘추관을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 경북의 태백산, 평북의 묘향산, 강원도의 오대산에 각각 1부씩 보관시켰다. 즉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선조대에 출판된 신인본, 마니산에는 원본인 전주사고의 실록,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시켰다. 광해군 9년(1617)에 편찬된 선조실록도 이와 같이 하였다

.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춘추관에 소장되었던 실록은 소실되었다. 또한 인조 11년(1633)에는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됨으로 인해 묘향산사고를 적상산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마니산 실록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었으나 현종 때 다시 보수하였다.

마니산 사고는 숙종 4년(1678)에 강화도의 정족산에 신설한 사고로 이전되었다. 인조 이후의 실록은 4부를 인쇄하여, 정족산(鼎足山)·태백산(太白山)·적상산(赤裳山)·오대산(五臺山)의 사고에 간직하고 조선조 말기까지 보관하여 왔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규장각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어 종친부 건물에 보관되었다. 적상산본은 창덕궁 장서각에 보관되었다. 오대산본은 동경제국대학으로 이전되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고, 이 가운데 27책이 서울대 도서관에 이전 보관되어 있다. 조선총독부에 이관되었던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29년 규장각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 도서관에 이관되어 보관되었다. 적상산본은 1946년의 도난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규장각에 현존하는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당시 병화를 모면한 전주사고본이다. 이는 그 후 강화의 마니산사고를 거쳐 정족산사고에 간직되어온 원본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이후 전주사고본에 의거하여 새로 찍은 3본 중 봉화 태백산사고에 간직되어 온 신인본, 그리고 그때의 교정본으로서 오대산사고에 간직되어 온 것의 잔존분과 파지로 존치되어 온 것을 장책한 잔여분에 해당한 것으로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국보 제151-1호. 정족산본 1181책으로 ≪문종실록≫ 권11과 ≪성종실록≫ 권70, 71, 80, 132, 133이 결락되었다.
2) 국보 제151-2호. 태백산본 848책으로 문종실록의 권11만을 제외하고 거의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1985년 3월 22일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되었다.
3) 국보 제151-3호. 오대산본의 잔여본 27책이다. 잔여본 27책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경제국대에 이관되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던 가운데 일부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중종실록≫ 중종 2년 5월에서 17년까지의 20책과 ≪선조실록≫ 선조 16년 1월에서 26년까지의 7책분이다.
4) 국보 제151-4호. 잔존분 21책이다. 이 책은 유래를 밝힐 수 없는 실록의 낱장으로 정종부터 광해군 때까지의 총 558엽의 낱장이 오랫동안 규장각에 파지상태로 남아 있다가 1972년 6월 21책으로 장책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왕조실록≫의 총 책수는 2,077책이다.

이 원본은 1997년 10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가운데 실록의 출판은 1929년에서 193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사진판으로 영인하여 선장본으로 30부를 출판한 바 있으며, 대부분 일본에 있고 7∼8부가 국내에 전존한다고 한다. 한편 1955년 11월부터 1958년 5월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서 태백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1/8로 축쇄, 국배판(菊倍版) 양장본 48책으로 영인하여 국내외에 보급하였다. 또한 일본 학습원(學習院) 동방문화연구소(東方文化硏究所)에서는 1953년이래 영인본으로 축쇄 간행해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600년 보존 비밀 풀린다
2008/02/15 오후 12:41 | 역사 자료들...... |

규장각 서고.
실록포쇄제명. 서고에서 실록을 꺼내 말리는 작업을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6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전해 올 수 있었을까. 그'비밀'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현재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은 1년여간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실록을'해부'하는 작업을 벌여 왔다. 손상된 일부 실록의 복구 방안을 찾고 장기 보존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우선 조선시대 당시 실록이 어떻게 제작됐고 또 어떻게 관리했는지 정밀한 역추적 작업을 벌여왔다.

이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흔히 당시 만들어져 온전히 전해진'유일본'으로 알려진 실록이 사실은 후대에 꾸준한 개보수를 통해 유지돼 왔다는 것이다. 규장각 신병주 학예연구사는 "조선 전기부터의 원본으로 알려진 '정족산본'중에도 군데군데 후대에 새로 만들거나 보수한 책들이 끼여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제작과 보관에 아무리 완벽을 기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훼손되거나 사라진 책들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만큼 꾸준한 개보수가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함께 실록을 보전하기 위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이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특히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했던'기록 정신', 그리고 수백년전의 일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격했던 관리체계가 주목받고 있다. 실록보존팀은 이같은 내용의 1차 연구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곧 발간할 예정이다.

◇엄격하고 치밀한 관리체계=흔히 실록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4서고 체제'를 든다. 실록을 한 곳에 모아두는 대신 지방 곳곳에 서고를 만들어 각각 보관함으로써 화재 등의 위험을 분산하는 방식을 썼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리스크 헤지'방식은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실록이 살아남을 수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 실록의 제작.보관의 전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신 학예사는 "조선시대의 실록의 제작과 관리는 단순한 서책 제작과 보관을 넘어선 국가적 대역사였다"고 강조한다. 단지 분산해 놓는 차원을 넘어 고도의 관리체계가 뒷받침됐다는 설명이다.

특히 당시 실록 제작과 보관과정에서 남긴 기록들은 연구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하다. 대표적인 것이 '실록청 의궤'.조선시대에 실록을 편찰할 때는 실록청이란 임시관청을 만들었다. '실록청 위궤'는 말하자면 이 실록청이 남긴'백서'로 실록을 제작해 서고로 봉안하기까지의 전 과정은 물론 투입된 물자와 투입된 인원까지 세세히 기록해 뒀다.

사후관리도 마찬가지다. 지방 서고의 실록들은 매 2~3년마다 꺼내 바람에 습기를 말리는'포쇄'과정을 거쳤다. 이때도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전 과정을 감독했다. 그리고 다시 실록의 보관상태를 소상히 점검해 '실록형지안'이라는 문서를 남겼다. 신 학예사는"당시의 상황이 워낙 상세히 기록돼 있어 책을 따라 실록 제작 과정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실제로 연구팀은 현재 손상 정도가 너무 심해 복구자체가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실록의 경우 장기적으로 의궤의 내용을 토대로 한 복제 제작도 검토하고 있다.

◇꾸준한 개보수=물론 당시라고 모든 과정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각종 시행착오가 있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밀랍본'이다. 종이에 밀랍을 입히는 것은 흔하지는 않으나 당시 중국에서도 활용된 방법으로 특히 벌레에 의한 손상을 막는데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존을 위해 사용한 이 밀랍이 지금은 뭉개지고 갈라지면서 오히려 훼손을 가속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실제로 후대에 가면 조선시대 사람들도 이를 알아 차렸던 것 같다는 것이 연구팀의 판단이다. 종이 전문가인 용인대 박지선 교수는"시간이 지날수록 종이에 입히는 밀랍의 양이 줄어들고, 명종실록 이후에는 아예 밀랍을 쓰지 않았다"며"이는 이미 당시에도 훼손이 나타났고, 밀랍이 훼손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훼손되거나 분실된 일부 서책들은 이번 조사에서 밝혀진 것 처럼 꾸준히 개보수했다. 현실적으로 문화유산을 아무리 철저히 관리한다하더라도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길은 없으며, 이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는 반증이다. 박 교수는"화재로 파괴된 낙산사에 비유한다면 실록은 서서히'불타는' 일종의 '슬로 파이어'(slow fire)를 겪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학예사는 "무엇보다 선인들의 기록을 중시했던 전통과 집념이 실록 보존의 원동력 "이라며 "이는 앞으로 보존 방안을 마련하는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