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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20개 언어의 달인'

'20개 언어의 달인' 직접 만나보니…
49세 서윤석씨 "밤마다 공부해 외무고시 준비도…"
김우성 기자 raharu@chosun.com

최근 조선일보 독자서비스센터에 제보가 들어왔다. ‘나는 국내 최초 20개 외국어 가능자다.’ “대학 때 외무고시 준비 중 6개 외국어를 동시에 공부했으며 이후 여러 일을 하면서도 저의 꿈 다국어를 항상 준비, 올해 7월12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20개 국어 강좌를 올리게 됐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는 숨겨진 ‘진짜 달인’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홈페이지(http://www.indo.co.kr)부터 찾았다. 그곳엔 영어 강좌부터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인도어, 아랍어, 태국어, 베트남어, 몽골어, 파키스탄어, 인도네시아어, 크메르어, 라오스어, 미얀마어, 티베트어, 네팔어, 뱅골어 등 20개 언어의 동영상 강의가 수록돼 있었다. 이중 아랍어 샘플강의를 클릭했다. 하얀 화면에 성별에 따른 아랍어 관사 변화를 담은 표가 떠 있었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한 남성이 이를 목소리로만 설명했다. 다른 강의도 클릭했다. 모두 같은 형식에, 같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49세의 언어 천재(?)


22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해방촌 5거리 인근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외국어 교재와 컴퓨터 관련 서적들을 꽂은 5단짜리 책장이 벽 두 면을 덮었고, 창문 바로 앞엔 긴 책상 위에 컴퓨터와 중국어 서적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폴리 강사라고 소개했다. 본명은 서윤석, 나이는 49세.


―외국어를 어떻게 배우게 됐나요?


“중학교를 중퇴하고 부산에 있는 철공소에서 용접 일을 했어요. 어느 날 부산일보를 보는데 고등학교까지만 나온 사람이 외교관을 했다는 기사가 있는 거에요. 박봉옥씨라고…. 제 우상인데, 그 기사 보고 외교관이 뭘까? 알아봤죠. 그러니까 가장 좋은 직업인 거에요. 용접사가 참 안 좋은 직업이어서…. 그때부터 밤마다 공부해 검정고시를 보고 뒤늦게 지방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 외무고시를 준비했죠.”

그때가 82년. 당시 외무고시는 3개국 외국어만 시험 봤으나 서씨는 남들보다 앞서려는 욕심에 6개 국어를 공부했다고 했다. 영어, 일어, 불어, 스페인어, 독일어, 중국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일본어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이 책이 다네다 데루도요라는 분이 쓰신 건데 서른 살에 ‘20개 국어’를 했다는 내용이에요. 대학 때 이 책을 보고 ‘아,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가 1984년이니까 25년 늦게 한국에서는 제가 최초로 20개 국어를 한 거지요.”

◆인도식당 하며 네팔어 배워


― 결국 외시는 안 되셨나봐요?


“네.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왔어요. 그때가 86년이지. 아랍어를 배우고 싶은데 부산엔 가르치는 데가 없으니까. 이태원에서 살면서 이슬람 사원에서 3년 가량 배웠어요. 그러다가 89년부터 인도 식당을 운영했죠.”


서씨의 외국어 배우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식당에 처음 고용했던 네팔인 디뽀와 모띠를 통해 네팔어를 먼저 접했다. 식당 단골들에게 1:1 개인 과외를 요청, 6개월 정도씩 배우기도 했다. ‘외국인의 거리’ 이태원이었던 만큼 식당을 찾는 외국인들도 다양했다. 그의 언어 습득 목록엔 매년 언어가 하나씩 추가됐다.


“인도어를 알면 파키스탄어, 방글라데시어, 네팔어까지 흡수가 되죠. 태국어를 하면 라오스어와 크메르어가 쉽고. 인도네시어는 영어 알파벳을 쓰는 데다가 문법이 쉬워서 쉽게 익혔어요. 베트남어는 발음이 약간 까다롭죠. 아랍어가 가장 배우기 어려웠어요.”


그 많은 언어를 배웠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서씨는 책장 위를 가리켰다. 그곳엔 키보드 박스가 대여섯 개 있었고 사인펜으로 크메르어, 스페인어, 독일어, 뱅갈어, 네팔어 등이 써 있었다. 서씨는 “저게 다 이번에 동영상 강의 만들 때 썼던 키보드에요. 일반 키보드 자판에 외국어 글자를 붙여 놓은 거죠”라고 했다. 그는 이어 경찰서장 감사장을 꺼내 보여줬다.


“91년도에 이태원에서 파키스탄인들끼리 싸워 살인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어요. 근데 얘네들이 형사가 물으면 영어를 아는데도 파키스탄어로 말을 하는 거에요. 진술서 작성이 어려우니까 용산경찰서 형사과장이 저한테 직접 찾아왔죠. 통역해달라고. 그때 받은 감사장이에요.”


―동영상 강의가 담긴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어떤 언어 강좌를 많이 찾나요?


“아랍어가 인기가 많죠. 수능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2외국어 준비할 때 아랍어가 쉬우니까 많이 하더라고요. 그리고 크메르어도 은근히 많아요. 요즘 캄보디아에 부동산 붐이 일어서. 네팔어와 티베트어도 한국에서는 가르치는 데가 없어요. 심지어 일본에서도요. 저만 가르치는 거죠."


◆“20개 언어 단어 테스트 하겠다” 물음에 “아, 그게 좀…”


아무래도 믿기 힘들었다. 그에게 간단한 테스트를 부탁했다. 책에서 간단한 단어를 물을 테니 그 나라 언어로 대답해 달라고 했다. 그가 망설였다. “아, 그게 좀…” 그러면서도 거절은 하지 않았다. 가까이에 있는 인도네시아어 회화 책을 집어 “죄송합니다”, “잘 지내십니까” 등을 물었다. 그는 “잘 지내십니까”는 책에 쓰여 있는 그대로 인도네시아어로 대답했으나 “죄송합니다”에선 약간 망설였다.


이번엔 자기소개를 부탁했다.일본어와 인도어, 중국어를 요청했다. 그는 약간은 어설프게 중간중간 말을 더듬으며 “저는 서윤석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일을 해오면서도 많은 외국어를 공부해왔습니다”를 3개국어로 말했다.


그는 부끄러워했다. 순간 얼굴이 빨개진 듯했다. 어쨌든 그는 20개 국어를 읽을 수도, 대강의 문법을 알고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 그가 말했다. “아이고, 부끄럽네요. 제가 요즘 동영상 강의를 만드느라 모든 언어를 다 보지를 못해서…” 그는 ‘진짜 달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 ▲ 22일 오후, 그의 집을 찾았다. 외국어 교재와 컴퓨터 관련 서적들을 꽂은 5단짜리 책장이 벽 두 면을 덮었고, 창문 바로 앞엔 긴 책상 위에 컴퓨터와 중국어 서적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책장 위엔 직접 만든 '외국어 키보드' 6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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