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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

오로지 낮은 곳으로 임했던 '백신의 황제'
별세한 이종욱 WHO 사무총장 누구인가?
연합뉴스(yonhap)
▲ 뇌혈전 긴급수술후 사망한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지난 2005년 11월 24일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 AP=연합뉴스
(제네바=연합뉴스) 문정식 특파원 = 22일 갑작스럽게 타계한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한국인으로서 유엔 시스템의 최고 정점에 서있던 인물.

이종욱 총장은 지난 2003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선출직 유엔 전문기구 수장이 됐고 오는 7월 21일 취임 3년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고인의 역량과 친화력을 볼 때 5년 임기를 무난히 마치는 것은 물론 2기 연임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 제네바 외교계의 평이었다.

제네바 외교가에서는 이 총장이 코피 아난을 뒤이를 차기 유엔 사무총장의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고 있었으며, 고인도 <연합뉴스> 기자와 종종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부인치 않았다.

이종욱 총장이 오는 7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는 G8(서방선진 7개국과 러시아) 정상회담에 초청받은 것도 그의 비중을 말해준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고인을 생전에 각별히 배려해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WHO의 사업에 아끼지 않았고 2차례 미국으로 불러 그를 면담하면서 '굿맨'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차기 UN 사무총장으로 끊임없이 거론

이 총장은 23년 동안 WHO에서 근무한 국제적 의료 테크노크라트. 하지만 직원 1만명이 넘는 유엔 기구를 이끌면서 조직과 사업을 활성화시키고 보건 문제를 글로벌 이슈로 만드는, 탁월한 정치력도 보여주었다.

빌 게이츠를 포함한 유명인사들로부터 에이즈를 포함한 각종 질병 퇴치 기금을 받아내는 등 '펀딩' 능력에도 탁월한 면모를 보여준 바 있다.

이 총장의 이런 노력은 미국을 포함한 회원국들의 호응을 받아 WHO는 여느 다른 유엔 산하 기구와는 달리 여유있는 예산을 운영할 수 있었다.

WHO 연례총회 의장인 엘레나 살가도 스페인 보건장관은 이 총장을 "비범한 인물, 비범한 리더였다"고 회고하면서 "그의 지도력 아래 세계보건기구는 더욱 강해졌고 글로벌 보건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

타계 소식에 각국 보건장관들과 관리들은 놀라움에 한숨을 쉬었으며 다수의 WHO 직원들은 눈물을 흘린 것은 이런 평가가 빈말이 아님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그가 WHO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83년 WHO 남태평양지역의 도서국가 피지에서 한센병(나병) 관리책임자로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이 박사는 그후 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 질병관리국장(1993∼94)을 거쳐 94년부터 WHO 본부 예방백신사업국장 및 세계아동백신운동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이 박사는 지난 1995년 백신국장으로 일하며 소아마비 유병률을 극적으로 떨어뜨려 미국의 과학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으로부터 '백신의 황제'라는 별호(別號)를 얻었다. 영국 의학전문지 <랜싯>은 그를 '조용한 뇌성'으로 칭했다.

이 박사는 1998년 할렘 브룬트란트 사무총장이 취임한 이후 총장의 특별대표직을 시작으로 WHO의 정책부서를 두루 거쳤다. 총장 경선에서 정치인 출신 후보를 물리친 것도 WHO 내부 문제점과 개혁방안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 평가된 덕분.

2000년에는 결핵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북한에 결핵치료제를 공급하는 등 19개 국가를 대상으로 결핵퇴치사업을 추진해 북한 지도부는 물론 주제네바 북한 대표부측과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나병 환자' 봉사 중 부인과 만나 결혼

45년 서울생. 경복고, 서울대 의대 출신. 형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참여센터 본부장직을 맡은 바 있는 이종오씨와 이종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등이있다.

이종욱 총장이 대학 재학시절, 경기도 안양 나자로 마을에서 나병 환자를 위해 봉사 진료를 하다 일본 출신의 동갑내기 부인 가라부키 레이코 여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유명한 일화. 당시 가톨릭 신자로 봉사차 한국에 온 레이코 여사와는 졸업후 3년 뒤인 79년 결혼했다. 이종욱 총장은 81년 하와이주립대에서 공중보건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83년 남태평양에서 나병과의 투쟁을 계속했다.

미망인 레이코 여사는 지금도 페루에서 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어 이종욱 총장과는 일년에 몇차례 정도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고, 아들 충호(28)씨는 미국의 명문 코넬대에서 전기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이종욱 총장은 가족과 떨어져 제네바 외곽 도시인 니용의 작은 아파트에서 검소하게 생활해왔다. 고인은 생전에 돈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다만 일 욕심만큼은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이 총장을 잘 아는 주변인들은 고인이 생전에 테니스와 스쿠버 다이빙, 스키, 크로스 컨트리 등과 같은 스포츠를 즐겼지만 고혈압 증후가 있었으며 과로가 화를 부른 것 같다며 그의 타계를 안타까워했다.

jsmoon@yna.co.kr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고 이 총장 장례식, 24일 WHO장으로 치르기로

(제네바=연합뉴스) 문정식 특파원 = 세계보건기구(WHO)는 고(故) 이종욱 사무총장 유족들의 뜻에 따라 24일 장례식을 WHO 주관으로 치를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와 누나 이종원씨, 동생 이종오 교수, 외아들 충호씨 등 유족들은 22일 오후 내부 의견을 모은 뒤 WHO측과의 협의에서 WHO 공식 장례식을 갖되 가톨릭 의식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장례식은 일단 24일중 제네바 중앙역 부근에 있는 노르트담 성당에서 거행키로 했으나 이 성당의 미사 일정을 조정하는 문제가 있어 구체적인 시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WHO는 구체적 일정이 마련되면 이를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고 이 총장은 전날 아침 의식 불명 상태에서 가톨릭 신자인 레이코 여사의 희망에 따라 가톨릭 영세를 받았고 유족측은 장례식을 마친 뒤 고인을 화장, 서울로 운구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이들을 만난 최 혁 주제네바 대사가 전했다.

WHO측은 연차 총회가 열리고 있는 유엔 유럽본부 대회의장 한 편에 조문록을 비치하고 각국의 조문객들을 맞기 시작했으며 총회 참석차 제네바를 방문중인 유시민 장관이 조문록에 가장 먼저 서명했다.

유 장관은 현지에서 한국 정부의 조문사절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주제네바 대표부는 노무현 대통령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등의 조전을 WHO사무총장 대행과 유족측에 각각 전달했으며 장례식을 위한 조화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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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당신은 가셨지만
희망과 정신은 스러지지 않습니다
[추도사]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을 기리며... 오늘 제네바에서 영결식
오마이뉴스(news)
지난 22일 타계한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장례식이 24일 낮 12시30분(한국시간 오후 7시30분) 스위스 제네바 중앙역 부근 노트르담 성당에서 WHO장(葬)으로 치러집니다. 이날을 끝으로 영면의 길을 가게 되는 이종욱 WHO 사무총장. 그의 후배인 김창엽 서울대 교수가 <오마이뉴스>에 추모의 글을 보내와 게재합니다. 김창엽 교수는 서울대 의대 교수를 거쳐 현재 같은 대학 보건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며, <빈곤과 건강>, <미국의 의료보장>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편집자 주>
▲ 뇌혈전 긴급수술후 사망한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 AP=연합뉴스
이종욱 총장님, 아니 선생님, 저 김창엽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대답 없으실 게 뻔한데도 몇 번을 이렇게 부릅니다. 금방이라도 우스개 소리를 섞어 대답하실 것 같아서입니다. 한국을 그렇게 오래 떠나 계셔도 저보다 더 정확한 한국말로 답하시던 것, 이젠 다시 더 못 듣겠지요. 다시 생각해도 또 황망합니다. 도무지 현실감이 생기질 않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 이렇게 급하게 가시려고, 3월말 갑자기 다녀가셨습니까. 지난 가을에 뵙고 몇 달 사이에 또 다시 오셨기에 이제는 자주 뵐 수 있으려나 괜히 즐거워했습니다. 결국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못하시는 운동이 없고, 담배는 물론 안 피시고, 술도 거의 입에 대시지 않는 분이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즘 세상에 만 예순 하나, 한창 일하실 나이에 참으로 아쉽고 야속합니다.

선생님을 영영 보내야 한다고 하는 이 마당에서야 선생님과 이어졌던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마저 원고 청탁을 받고서야 이제야 기억을 수습하는 형편입니다. 사람살이가 다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참으로 무심한 인간사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마저 없었으면 그냥 허둥지둥 기억의 저편에 묻힐 것들이었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기껍습니다.

본래 저같은 사람의 머리에는 그동안 선생님이 뭘 하셨던가 하는 연보 형식의 기억이 버릇이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뻔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동안 뭘 하셨는지 공적인 영역에 속한 활동과 업적이야 언론매체가 다 다루었으니 제가 무얼 또 보태겠습니까. 아무래도 연보는 어려울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과 얽혀진 기억의 단편들이 어지럽게 기억을 파고듭니다. 저로서는 사실 이런 기억이 백배 더 소중합니다. 아무리 기사가 자세한들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 나누었던 고민, 배웠던 경험을 한정된 공간에 다 다룰 수는 없겠지요. 선생님의 열정과 땀도 체온 없는 메마른 기사가 다 담기는 역부족입니다.

속 좁은 애국심으로 버티기 힘들다는 당신의 가르침

▲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은 취임 뒤 첫 해외순방 중 한 곳으로 남아프리카를 방문했다.
ⓒ WHO 홈페이지
저한테 남아 있는 선생님의 모습은 제일 처음 '열정'이라는 단어와 겹칩니다. 언제 저에게 말씀하셨던가요. 기억도 잘 안 나네요. 마닐라의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 사무처에 근무하실 때 말입니다. 한국에 오셔서 그 해 일년에 2백 몇 십일을 해외출장을 다녔다고 하셨지요. 처음에는 농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진담인 줄 알고도 역마살이 끼셨냐고 무심히 농담처럼 지나쳤지만, 그 이후에도 생각이 날 때마다 참 용하다 싶었습니다.

세계일주 여행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두 해도 아닐 텐데, 보통 사람으로야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입니까. 세계보건기구의 직원이라고 다 이러지는 않습니다. 당시 만성질환을 담당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쉴 새 없이 다니셨던 캄보디아니 라오스니 하는 나라들에서 무슨 좋은 밥에 잠자리가 가능하기나 했겠습니까. 게다가 건강이 나쁘고 생활이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내내 하셨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말씀은 안 드렸지만, 그 때까지 저에게 익숙했던 애국심이니 민족의식, 이웃에 대한 사랑이니 하는 것과는 다른 '인류애'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는 것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저를 찾아와서 국제기구에 가고 싶다고 하는 젊은이들에게 반드시 그 이야기를 합니다. 화려한 외교관을 상상하지 말라. 그리고 편협한 인종주의, 속 좁은 애국심 같은 것으로는 국제기구에서 견디기 힘들다. 게다가 열정 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선생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뜻함과 소탈함의 이미지도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게 대하셨던 것으로 유명하셨지요. 사무총장 자리에 계시면서도 아무리 이름 없는 학생, 한국의 대학생이 찾아와도 사정을 들어주고 충고하고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기도 하고 보기도 했습니다. 5000명 직원을 거느린 국제기구의 장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소탈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무총장에 당선되고 나서 막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자정 무렵 모든 일정을 끝내고 장난처럼 숙소 가까운 곳에서 요기할 곳을 찾아보자고 말씀하셨던 것도 기억납니다. 지금도 깜짝 놀랐던 그 때 기억이 새롭습니다. 결국 시간이 늦어 찾진 못했지만, 국가원수급의 예우를 받는 사무총장 당선자가 허름한 식당을 일부러 찾는 것은 흔히 보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기사가 모는 공용차에도 스스럼없이 기사 옆자리에 앉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스스럼없이 사람을 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어찌 소탈함에서만 나오겠습니까. 옆에서 뵙기에 많은 사람을 애정을 가지고 대하신 것은 앞으로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는 동료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표현하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 꼭 학생뿐 아니라 기자든 교수든 주위 사람들에게 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의미까지 해석하곤 하셨으니까요. 같이 일할 사람을 구하는 모습, 세상을 향해 그걸 설명하는 것, 모두 좋아보였습니다. 일찍부터 국제적 활동의 중요성, 국제 차원의 인도적 활동에 대한 한국의 역할 같은 것을 힘주어 강조하셨지요.

사실 그건 더 오래 사시고 활동하면서 한국에서 더 많이 보여 주셨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직도 우리나라가 국제 사회에 제대로 기여를 하고 있지 못한 것 말입니다. 무슨 여유가 있다고 국제 활동을 하느냐는 분위기가 아직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실제 예산이나 활동에 제약이 적지 않습니다. OECD 국가라고 하면서도 2005년 현재 국민총소득 대비 정부개발원조(ODA)의 비율이 0.084%에 지나지 않습니다. 10위니 11위니 하는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로서는 떳떳한 수치가 아니지요. 외교통상부가 노력은 하는 모양이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않고 그냥 늘어날 리야 없는 것이니, 선생님이 좀 더 역할을 해 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매우 큽니다.

돈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던 조언

▲ 지난 2005년 12월, 파키스탄 대지진 현장을 방문했던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
ⓒ WHO 홈페이지(WHO/Chris Black)
국제기구에 대해 알아보느라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비록 빈궁하지는 않더라도 유족하게 살 생각은 포기하라고. 이것 역시 선생님을 가까이서 보고 배운 것입니다.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선생님 자신의 삶이 그러셨으니까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하와이 대학 보건대학원에 진학해서 전염병 공부를 하신 이후 선생님은 경제적 여유와는 별 관련이 없는 생활을 해 오셨습니다. 오죽하면 언뜻 언뜻 아드님의 학비 걱정을 제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후배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무엇을 하든 돈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 경제적인 면을 가치판단의 최우선 순위로 삼는 것은 낭비이다." 요즘처럼 돈을 좇는 세태에서 젊은 학생들이 얼마나 공감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선생님이 평생을 추구하신 삶을 표현한 것이라 믿습니다.

공사 구분을 그리도 엄격하게 하셨단 말씀도 이젠 꼭 드리고 싶습니다. 사무총장에 당선된 이후 많은 한국 분들이 알게 모르게 선생님께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야박하다고 할 정도로 인연이 있는 분들을 가까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원망을 들으신 일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저도 최근에야 처음으로 이메일을 보낸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무총장 취임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사실 별 것 아닌 내용의 연락도 하지 않게 된 것은 이처럼 철저하게 공사구분을 하시는 선생님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인연으로 국제기구의 사명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고, 선생님은 그것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때로는 강박적으로 지키셨던 것입니다. 혹 섭섭하셨던 분들도 이제는 다들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덕분에 국제적으로도 한국 출신의 지도자에 대해 좋은 이미지가 만들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젠 더 이상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겠군요. 일부러 저를 도와주신 일은 없지만, 외국의 전문가를 만날 때, 어디 기관을 방문할 때 알게 모르게 선생님의 간접적인 도움을 받은 일은 많습니다. 순전히 우연이라도 'JW Lee'를 개인적으로 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대접'이 달라지곤 했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무슨 국제보건기구의 권력 때문에 그랬겠습니까. 사실 권력으로 치면 별 것도 없지요. 순전히 국제보건기구의 위상과 선생님의 역할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폴리오를 지구상에서 거의 완전히 없앤 일, 아프리카의 에이즈 퇴치를 위한 '3 by 5' 같은 사업은 어디에서나 두고두고 이야기가 나옵니다. 분명 역사에도 이름을 올리겠지요. 이제 그런 선생님의 역할을 어디에서 다시 찾으며, 어떻게 또 도움을 입겠습니까.

24일 낮에 제네바에서 영결식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아껴주시던 이 후배는 멀리 있어서 직접 찾아뵙지도 못합니다. 제네바에서 다시 보자고 했던 말씀도 이제 지키지 못합니다. 한편으로 죄송스럽고 또 원망스럽습니다. 좀 더 희망을 보여주시지 않고 왜 이런 아픔을 주시는지요.

▲ 김창엽
그렇지만 이제는 잊고 편히 쉬십시오. 세상에서의 역할은 멈추지만, 몸으로, 말씀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 주셨던 당신의 희망과 정신은 그냥 스러지지 않습니다. 고리에 고리를 이어 선생님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세상의 아픈 사람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이를 것입니다. 괜찮은 삶이었다 여기시고, 사랑하는 평생이었다 생각하시고 이제는 영면하십시오.

2006년 5월 24일
김창엽 올림